시경(詩經)/국풍(國風)

10. 당풍(唐風) 12. 채령(采苓)

허접떼기 2022. 2. 27. 19:30

감숙성 정서(定西)시 위원(渭源)현의 수양산(일명 뇌수산雷首山)

采苓 首陽之 채령채령 수양지전

人之爲言 苟亦無信 인지위언 구역무신

舍旃舍旃 苟亦無然 사전사전 구역무연

人之爲言 胡得焉 인지위언 호득언

 

采苦采 首陽之下 채령채령 수양지하

人之爲言 苟亦無 인지위언 구역무여

舍旃舍旃 苟亦無然 사전사전 구역무연

人之爲言 胡得焉 인지위언 호득언

 

采葑采葑 首陽之東 채령채령 수양지동

人之爲言 苟亦無從 인지위언 구역무종

舍旃舍旃 苟亦無然 사전사전 구역무연

人之爲言 胡得焉 인지위언 호득언

 

으아리 캐러 으아리 캐러, 수양산 꼭대기라

남의 말은 진짜 역시 믿을 수 없네

버리고 버려라 진실로 또 그렇지 않다네

남의 말함을 어찌 얻겠는가?

 

씀바귀 캐러 씀바귀 캐러, 수양산 아래라

남의 말은 진짜 역시 쫓을 수 없네

버리고 버려라 진실로 또 그렇지 않다네

남의 말함을 어찌 얻겠는가?

 

순무 캐러 순무 캐러, 수양산 동쪽이라

남의 말은 진짜 역시 따를 수 없네

버리고 버려라 진실로 또 그렇지 않다네

남의 말함을 어찌 얻겠는가?

 

 

(채,연) : 영(蘦,감초),도꼬마리,원추리,씀바귀,버섯. 연꽃(연)

<毛傳>은 大苦(참으아리)의 뿌리(황약자 黃葯子)라고 한다.

심괄(沈括,1031-1095)몽계필담夢梦溪筆談에서 黄药으로 그 맛이 써 대고라 했다고 적었다.

유월(俞樾,1821-1907)군경평의群經評儀에서 ()으로 물건이 아니라 하고, 감초는 아니라했다.

 

首陽(수양) : 수양산. 중국에 수양산은 여섯 곳이나 있다.

여러 자료에 속수(涑水)와 황하(黃河) 사이에 동서로 펼쳐져 있는 낮고 평평한 산지라고 하는 데

현재 그곳에 수양산이란 이름은 없다.

마륭(馬隆,西晉의 교위)은 위나라 하동 포판 지역으로 화산(華山) 북 하곡(河曲) 가운데라 하고

명대 왕직(王直,?-1559)은 진나라 땅 하동 포판(蒲坂)에 있다고 하고

반고에 이어 《漢書》를 이어 썼다는 여인 조대가(曹大家)는 농서현(隴西縣)에 있다고.

晉,宋간 소설가 대조(戴祚)는 낙양 동북 수양산으로 이제사가 있고 언사현(偃師縣) 서북이라고,

《사략史略》에서는 하동부 하동현 남쪽이라고,

唐代 장수절(張守節)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기양(歧陽) 서북이고 이제가 굶어 죽은 곳이라고 한다.

정말 중국답다.

 

현대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백이숙제의 수양산이라고 공인하며 인터넷에 올라오는 지역은

감숙성 정서(定西)시 위원(渭源)현 연봉진(蓮峯鎭)이다.

이 산이 이제채미지처(夷齊采薇之處)였다는 기록이

위원현 오른쪽 농서현(隴西縣)이 속했던 《공창부지(鞏昌府誌)》에 실려 있다.

 

죽어 백이,숙제라는 시호를 갖는 상나라 말기 서로 왕위를 양보한 형제가

주나라 姬昌이 어질다 하여 찾아갔는데

이미 죽은 희창의 아들 周무왕이 상나라를 치려 출정하자

부친의 상중에 불가하다고 만류하다 겨우 강태공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수양산에 의거하여 고사리 등의 나물을 캐어 먹다 죽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백이 숙제가 고죽국(孤竹國) 사람이라 한다. 그들 부친이 고죽군이다.

고죽국은 현재 천진 동쪽 150km 거리의 하북성 당산시 동정현, 노룡현에 흔적이 있다.

 

조카의 제위를 찬탈해 1402년 황제에 오른 영락제 명 태종은 1421년 북경으로 천도하며

고대 중국의 유주(幽州)가 북경일대라고 세상에 알린다. 역사왜곡의 신호탄이다.

유주내 갈석산(碣石山)과 이,제의 무덤을 하북성 창려현과 노룡현으로 옮겼다.

유주는 지금의 북경일대 남쪽 250km에 있었다.

<주례周禮 직방職方>에 고대 9주의 동북쪽 유주는 우공(禹貢)의 기주(冀州)였다. 기주는 현재 하북성 위수시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기주의 10개군은 요동 요서 우북평 낙랑 현토 상곡 어양 발해 대 탁이다. 이후 국경 변경에 의해 탁과 발해가 빠지고 연, 범양, 광령, 창려가 추가된다.

유주 관할지역이 산서성에서 요동과 한반도까지 옮겨지고 넓어진 것이다.

 

고죽국이 상나라 제후국이라고 중국은 우긴다,

정해놓은 결론에 역사사실도 억지로 끼워 넣는다. 일본과 다르지 않다.

 

《단군세기》 36세 매륵 단군조에

“52년(BC653) 戊辰에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燕)을 정벌했다.

연이 제(齊)에 알리니 제가 고죽에 쳐들어왔는데 이기지 못하자 구걸하고 물러갔다”

《史記》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齊桓公 23년 북방 만족(蠻族) 산융(山戎)이 연을 침공하자

연은 바로 제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그를 승낙한 환공은 연에 출병해

산융을 고죽까지 몰아내고는 군사를 돌렸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만족과 산융은 (단군)조선이다.

제환공이 회맹에서 말하길 “나는 이미 남으로 소릉(召陵)까지 원정해 웅산(熊山)을 보았고 북으로는 산융과 이지(離枝)

와 고죽까지 토벌했다. 서로는 대하까지 토벌하고자 사막을 넘어간 일도 있었다”는 기록에서 고죽이 연과 제와는 적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고죽이 상나라의 제후국이란 말인가?

 

중국은 노룡현에 맹랑하지만 이,제의 고향이란 뜻으로 夷齊古里라고 만들고

노룡현의 수양산을 두고 이제의 고향이라고 광고한다.

상나라 수도였던 은의 옛터인 은허(殷墟)는 하남성 안양현에 있다.

영향권이지 철조망이 아니라도 고대 강역에서 제후국이 생뚱맞은 곳에 있을리 만무다.

 

고죽하(孤竹河)라는 강이 남양시 서협현에 있는 데 이곳이 중국지도상 유일한 孤竹이라는 지명을 갖고 있다

그곳은 안양에서 서남 380km 떨어져 있고 당시 주나라의 수도였던 洛陽과 150km 떨어져 있다.

억지일지도 모르나 고죽하의 지역이 고죽국이라면 타당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고조선과 연이 다투던 고죽국은 분명 요서이거나 그 위일 것이다.

백이 숙제의 아비가 고죽군이었다면 국명이 아닌 지명 고죽일 것이고 나는 그곳을 고죽하와 연결지어봤다.

백이 숙제가 고죽국의 왕자라고 하는 것도 믿을 바 없지만

상나라 주(紂)가 서백후(西伯侯)로 봉했던 희창을 찾아갔다면

주나라를 찾아갔을테고

희창이 文王이 되고, 세월 흘러 죽자 만나 무왕에 실망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나 먹었다면

그럼 그 지역은 주의 수도 낙양 근처일 것이다.

주가 상을 공격하여 멸하였으나 상상이 가능한 거리일 것이며

이,제가 희백을 찾아간다해도 상상 가능한 거리지

요서에서 낙양은 1200km 떨어진 거리로 3천년 전에 가능한 일인가?

한반도 최북단 함북 온성에서 최남단 해남까지가 1,000km가 안된다.

 

상나라 왕족의 후손이 살던 宋을 周武王이 분봉하며 공작을 내린 이유는

주가 지배하고 있으나 상나라의 문명수준이 주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개국공신 태공망이 제나라를 분봉받을 당시 후작임을 감안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고죽국이 상나라의 제후국으로 요서에 위치한다는 것은 황당하다.

 

아마도 춘추시대 당시 이,제가 올랐다는 수양산은 속수와 황하 사이의 포판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곳에 있었다는 수양산은 작은 산으로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다는 것이다.

아울러 춘추시대 당나라 영역이라면 더더욱 포판 즉 지금의 영제(永濟)가 맞다고 본다.

지금의 6곳 수양산 각기에 이,제의 고사를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다.

 

누군가 고사리를 캐고 황약자를 캐려면 높아야한다는데 웃음이 난다.

높지 않아도 고사리도 황약자도 있다.

수양산은 국내에도 몇 곳 있는데 그 중 황해도에 있는 수양산은 성삼문의 시조로 이름이 있다.

 

爲言(위언) : 말을 함, 일설은 爲를 僞로 해하여 거짓말을 하다로 주한다.

(구) : 진실로, 구차하다

無信(무신) : 勿信 믿을 수 없다 라고도 한다.

舍旃(사전) : 남의 말을 들어도 흘려 버려라로 보는 이가 있다.

 즉 舍는 버린다로 旃을 어조사로 특히나 之焉의 합성으로 본다.

(고) : 씀바귀

(여) : 쫒다. 따르다. 일설에는 用(용)으로 無用 즉 쓸모없다나 勿用 즉, 아는 체 않다 로 본다

(봉) : 순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