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철(金秀哲)은 조선 말기의 화가로, 그의 자는 사익(士益), 사앙(士盎), 호는 북산(北山)이며, 본관은 분성(盆城, 지금의 김해)이다. 이름을 '김수철(金秀喆)'로 쓰기도 한다.
그의 출신이나 생애 등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동대문 밖 석관동(石串洞)에 살았다고 하며, 같은 시기에 유사한 화풍을 구사한 김창수(金昌秀)와 동일인일거라 가늠되고 있다.
연대를 알 수 있는 김수철의 작품 중에 '무릉춘색도'(武陵春色圖)가 1862년으로 가장 늦게 제작되어서 그가 이 시기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수철은 같은 중인 계층의 여항문인(閭巷文人)들과 교유했다.
그는 조희룡(趙熙龍,1789-1866), 유최진(柳最鎭,1791-1869), 전기(田琦,1825-1854), 유재소(劉在韶,1829-1911) 등 벽오사(碧梧社) 모임의 동인들과 교유가 잦았다.
특히 전기, 유재소와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전기는 김수철에게 그림 주문을 중개해주기도 했다.
김수철의 그림에 화제(畵題)를 쓰기도 한 도화서의 화원 김영(金瑛,1837-?)은 김수철과 같은 분성 김씨였으며,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의 동인이었다.
이렇게 김수철과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 여항문인들은 대개 중인들로 시를 짓고 즐기는 모임인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었으나, 북산이 특정한 시사에 일원으로서 참여했는 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849년에 김수철은 김정희(金正喜)에게 그림 평가와 지도를 받기도 했다.
김정희(金正喜)가 14명의 서화 작품을 평가하고 지도했던 내용을 전기와 유재소가 적은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는 김수철의 산수화가 평가받은 내용도 있다. 이것이 김정희의 제자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싶다.
(구도가 대단히 익숙하고 붓놀림에 막힘이 없다. 다만 채색이 세밀하지 못하고 인물 표현에서 속기(俗氣)를 면치 못했다.) 라는 평을 했고,
또 다른 그림에 대해서는 (극진함이 있어 기뻐할 만한 구석이 있다.)고 했다.
위창 오세창이 뒤에 그림들을 모아 병풍을 만들면서
김수철에 대해서는 자와 호를 소개하고 이어 김정희의 평을 적었는데,
‘有極可喜處 不作近日一種率易之法’이라 썼다.
‘극진함이 있어 기뻐할 만한 구석이 있다. 요즘 일종의 솔이지법(率易之法) 같은 것은 따라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될 듯하다.
솔이지법(率易之法)은 흔히 ‘간솔하고 담백한 화풍’이라고 하는데,
추사가 말하는 솔이지법(率易之法)은 원나라 말기의 화가 예찬(倪瓚)의 특징인 ‘거칠고 간략함[荒寒簡率]’을 억지로 꾸며내는 것을 가리킨다.
당시에 문인화라는 명목으로 예찬(倪瓚)의 그림을 흉내 내어 대충 붓질하는 화풍을 질타하는 말이다.
그런데 추사도 예찬 풍의 <세한도>를 그렸다.
추사는 그림을 서(書)의 연장으로 보았다. 글씨든 그림이든 ‘문자향 서권기’가 있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추사는 단순하고 간결한 필법을 따르다 습기(習氣)에 빠지지 말고, 문인화의 본뜻을 깨달으라는 경계의 말을 한 것이다.
화훼화의 경우에 김수철은 매화, 국화 같은 사군자뿐만 아니라 작약, 능소화, 수국, 등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꽃을 그렸다.
김수철은 당대에 유행했던 남종화풍을 추구하면서도 간략한 형태와 속도감 있는 필치, 담채 등을 통해 자신만의 화법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 된다.
조희룡이 남긴 말 불긍거후(不肯車後), 남의 수레 뒤를 쫒지 않겠다는 생각은 당시 여항문인 모두가 갖고 있지 않았을까?
이 글은 문징명(文徵明,1470-1559)의 《제양일도(題養逸圖)》 시의 첫 번째 구절에서 따왔다.
書卷茶爐百慮融 서권다로백려융
夢回午枕竹窓風 몽회오침죽창풍
忙身見畵剛生愧 망신견화강생괴
安得身閒似畵中 안득신한사화중
융,풍,중의 음률을 가진 이시를 해석해 본다.
서적과 차 화로는 온갖 생각을 녹이고
낮잠에 꿈을 꾸니 죽창에 바람이 든다
바쁜 몸이 그림을 보니 바야흐로 부끄러움이 생기는데
어찌하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듯 한가할 수 있을까?
북산은 이 시의 忙身을 身忙으로 바꿔 적었다.
문징명은 명대(明代) 시인이며, 서예가요 화가다. 시, 문, 서, 화 모두에 능해 당시 사절(四絶)이라 불렸다.
초명은 벽(壁), 자는 징명(徵明), 후에 자를 징중(徵仲)이라 고쳤다.
형산(衡山)이 선향이라 호도 형산이며, 장주(長州, 지금의 소주(蘇州)태생이다.
아울러 심주(沈周) 당백호(唐伯虎) 구영(仇英)과 함께 명사가(明四家)로
축윤명(祝允明), 서정경(徐楨卿), 당인(唐寅)과 함께 오문사가(吳門四家)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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