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김홍도의 단원도와 글

허접떼기 2020. 10. 20. 12:16

김홍도의 <단원도(檀園圖)>, 1784년, 개인소장

그림 상단에 우측에 두 절구의 시가 적혀있다.

錦城東畔歇蹇驢 금성동반헐건려

三尺玄琴識面初 삼척현금식면초

白雪陽春彈一曲 백설양춘탄일곡

碧天寥廓海山虛 벽천요곽해산허

금성당 동쪽 가에 절뚝발이 노새를 쉬게 하고,

석자 거문고로 처음 만남 노래하네.

양춘백설 한 곡 뜯으니

푸른 하늘 광활하고 바다와 산이 비었구나.

 

檀園居士好風儀 단원거사호풍의

澹拙其人偉且奇 담졸기인위차기

誰敎白首山南客 수교백수산남객

拍酒衝琴作許癡 박주충금작허치

단원거사는는 풍채가 좋고 반듯하며

담졸 그 사람은 크고 기이하다.

누가 흰머리의 산남의 나그네로 하여금

손뼉치며 술마시고 거문고 치며 미치게 만들었나.

 

滄海翁作 창해옹작

정란이 지었다.

 

진관동 금성당(錦城堂)이 남아 있다.

금성당은 금성대군을 주신(主神)으로 모신 굿당이다.

금성대군(1426-1457)은 세종대왕의 여섯 째 아들로 단종의 숙부인데,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사되었다. 이후 전국의 무속신앙에서 금성대군을 신격화하였으며, 특히 서울과 경기지역의 많은 무당들이 그를 영험한 신으로 모셨다. 서울에는 진관외동(구파발) 외에 마포 들머리(망원동,노들)와 각실점(월계동)에도 금성당이 있었다. 그러나 도시개발로 사라지고 지금은 유일하게 진관외동의 금성당만이 남았다. 구파발에는 다시 아랫금성당과 윗금성당이 있었는데 지금의 금성당은 아랫금성당이다. 현재의 건물의 건축시기가 1800년도 초반이라 한다. 그렇다면 1780년대의 금성당은 현재의 위치가 아닌 좀 더 북한산에 가까웠던 윗금성당일 것 같다.

금성의 의미와 장소에 대한 의구심이 어쩌면 억지는 아닐까 반문하며 그저 막연히 비단을 뜻하여 아름다운 성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된다.

 

김홍도 전기작가인 이충렬씨는 단원이라는 곳이 종로 청운동 자하문터널 위 백운동천 계곡이라고 주장했다.

단원의 위치 비정은 학계에 분분하다.

미술사학계는 금성을 금성산이라고 하는 반면 이충렬 작가와 홍순민 교수는 금성을 그저 아름다운 성 정도의 뜻이라 새기며 성벽의 동편 즉 한양도성의 동편은 인왕산 마지막 백운동천의 상류라 밝힌다.

그렇다면 굳이 정란이 단원의 집을 한양도성의 동편이라 쓰기보다는 안()이라고 했어야 더 맞을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담졸(澹拙)은 강희언(姜熙彦)의 호다. 자가 경운(景運)이다. 다음백과와 두산백과사이트에서는 1710년생이라 하고 네이버나 다른 어떤 이의 기록은 1738년에 태어났다고 적혀있다. 위 그림으로 추측해보면 네이버 백과가 타당하다. 1754년 음양과에 급제하였다. 사족은 아닌 것이다.

근처에 사는 정선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하는 데 담졸이 그린 인왕산도를 보니 수긍이 된다.

윗 글로 미루어보면 강희언은 1781~1784년 사이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거처 즉 단원(檀園)에 시대의 등산인 정란이 찾아와 근처에 사는 강희언과 함께 한 술자리를 그린 것이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 김홍도가 쓴 제발은 이렇다.

滄海先生北登不咸而窮塞垣 東金剛訪余於檀園弊塵

時辛丑之淸和節

日暖園林萬化方暢

余鳴琴姜澹拙景運佐酒先生登壇耳 因成眞率會

居然之頃 星霜五易運景?今作千古人 秋栢之叢已實矣

余窮不能爲家 留滯山南寄食郵館 歲將周矣

忽遇先生於此地 鬚眉鬢髮之間雲氣尙聚其精力老且不衰

自言開春將向瀛州之漢拏山甚可奇壯

五晝夜劇飮縱談如檀園疇昔之游 悲感繼之

遂作一幅檀園圖以先生

圖卽其時光景 而上面兩節詩卽先生當日漫詠

甲辰十二月立春後二日 檀園主人金士能

 

끄트머리에 아랫글씨가 첨부되어있다.

古松流水觀道人李文郁觀

 

창해선생은 북으로 백두산에 오르고 변경에 다다랐고 동으로는 금강산에 올랐다.

누추한 단원에 있는 나를 찾았는데, 때는 신축년(1781년, 정조5년) 4월이었다.

날이 따사로워 숲 온갖 것들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거문고를 울리고 강담졸 경운은 술 동무이고, 선생은 정자에 오른 벗이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진솔회가 만들어졌다.

평안하고 조용히 순식간에 세월이 다섯 번 바뀌었다.

경운(강희언)은 지금 벌써 옛 사람이 되었다.

가을 잣나무 열매는 이미 맺었고 나는 궁색하여 집을 돌보지 못했다

산남(경상도)에 머물며 역참 객사에 얹혀 밥을 먹는데 해가 장차 한 바퀴 돌려고 한다.

갑자기 이곳에서 선생을 만났다.

수염과 눈썹, 귀밑털과 머리털 사이에는 흰 기운이 이미 모여 그 정력은 늙었으나 쇠하지 않았다.

스스로 말하길 다가오는 봄에 제주의 한라산으로 향하고자 한다니 참으로 기이하고 장하다. 다섯 밤낮으로 실컷 술을 마시고 거리낌 없이 말하니 단원에서의 옛 적 벗처럼 하였는데 슬픈 느낌이 뒤를 따랐다.

마침내 선생에게 바치고자 한 폭의 단원도를 그린다.

그림은 곧 그때의 광경이고

윗면 양 절구의 시는 선생이 당일 마구 읊었던 것이다.

 

갑진년(1784년, 정조 8년) 12월 입춘 2일 후,

단원주인 사능(士能) 김홍도가 그렸다.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李寅文,1745-1824이후)이 봤다.

 

창해(滄海)는 큰 바다를 뜻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나는 진시황을 습격했던 창해역사(滄海力士)가 강원도 강릉이 고향이라는 전승이 떠올랐다.

창해일사, 창해거사 나이 들어서는 창해옹으로 불렸던 정란(鄭瀾,1725-1791)은 본디 군위사람이라 한다.

 

웹진 담 201910월호에 소설가 김현경이 조선 덕후 베스트5에 정란을 2위에 올리며 여행에 미친 자라 소개했다.

지금의 운송수단과 비교할 수도 없고 당대 명망가들이 한 무더기를 형성해 산천을 주유했던 것과도 달리 그저 청노새와 종 1명을 데리고 조선의 명산을 모두 올랐다고 하니 단원의 말대로 장대한 일을 하였다.

정란의 종과 노새가 아래에 그려졌다

유람한 각지에서 산수유기를 썼고, 화가와 문장가들로부터 자신의 산행을 묘사한 그림과 글씨를 받았는데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불후첩(不朽帖)’ 이라는 이름을 달았다고 한다. 2004년 정란이 소장하다가 안산의 신광수 집안에서 수장하던 와유첩(臥遊帖)’이 공개되었었다. 4쪽의 그림은 최북과 강세황, 허필의 그림이었다. 어의없게 변영섭 교수가 신분을 초월한 교유의 증거이며 예인들의 유희라고 평했던 기억이 난다.

 

不咸(불함)끝이 없다’ ‘다함이 없다로 직역되는 데, 바로 백두산이다.

塞垣(새원)은 변방의 울타리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을 새원이라고도 말한다. 압록강과 붙어 있는 지금의 중국 집안(集安)시에 있는 고구려 성인 환도산성(丸都山城)은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淸和節(청화절)은 음력 4월을 달리 이르는 말로 남북조시대 시인 사령운(謝靈運,385-433)의 시에서 유래됐다.

佐酒(좌주)술자리를 같이하다’, ‘술동무를 하다’ ‘안주거리를 하다등으로 쓰인다.

登壇(등단)登臺(등대)와 같이 무대에 오르다이다.

()도맡아 처리하다라는 뜻도 있으나 손님으로 자리한 사람이 술자리를 좌우지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은 벗이나 동지를 뜻하기도 하니 벗으로 왔다로 해하는 것이 어떨는지.

眞率會(진솔회)는 진실하고 솔직하게 예절에 거리낌 없는 술자리 모임을 말한다.

居然(거연)슬그머니, 쉽사리라는 뜻과 평안하고 조용하게’ ‘심심하고 무료한 채로라는 뜻이 있다.

景運(경운)은 오자(誤字)같다. 문맥으로 보아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위에서 언급한 강희언의 자인 運景을 거꾸로 쓴 것이다.

山南(산남)은 고려 십도 중의 하나인 산남도를 말하기도 한다.

영역은 가야산 남쪽 진주, 함양을 중심으로 남해까지 다다랐는데 실상 조세를 거두는 범위 정도였다.

산남도가 영동도와 영남도를 아울러 경상도로 변천되었고,

안동에 있던 단원과 군위사람 창해가 만난 시기로 미루어 산남은 영남의 다른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寄食郵館 (기식우관) : 기식은 남의 집에 얹혀 밥을 먹음을 말하고 우관은 역참의 객사를 말한다. 김홍도는 17831228일부터 안동에 있는 안기역 찰방을 제수받아 1786년까지 지냈다. 찰방은 종6품의 지방관리직이다.

鬚眉鬢髮(수미빈발)은 수염, 눈썹, 귀밑털, 머리털을 말한다.

瀛州(영주)는 제주도를 말한다. <사기>에 나오는 봉래(蓬萊), 방장(方丈)과 함께 삼신산 중의 하나다. 금강산, 지리산과 함께 한라산을 조선의 삼신산 중 하나로 일컫는다.

劇飮縱談(극음종담)은 아무런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며 취하도록 술을 마신다는 말이다.

()이라 쓴 것으로 봐도 연장자나 존경하는 이에게 드린다는 뜻이 된다.

漫詠(만영)은 무언가에 넘쳐 질펀하니 마구 읊는다는 말이다.

士能(사능)은 김홍도의 자(). 사능이라 쓴 것에 미루어 연장자에 대한 자기 낮춤이라고 나는 본다.

 

그리고 김홍도와 동년배이면서 같은 도화서 친구인 문욱 이인문이 제발의 끝에 마치 나도 봤다를 외치듯 자신의 호와 함께 적었다.

 

 

 

참고 : 강민재, 1973.06, <檀園圖>, 考古美術 第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