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궁산야수>라는 이름으로 간송미술관에 있다.
이 그림 중앙 위에 써 있는 글은 이렇다.
窮山野水之濱, 궁산야수지빈,
固自有荒凉寥落之趣. 고자유황량요락지취.
但樹間近峰,如美人瘢痕. 단수간근봉,여미인반흔,
何不作曠埜澹沈色也. 하부작광야담침색야.
惜哉. 석재.
鶴山題 학산제
거친 산과 들판을 흐르는 물가는
본래 진실로 황량하고 쓸쓸한 정취가 있다.
그러나 나무 사이 가까운 봉우리는 미인의 흉터 같다.
어찌 빈 들에 담백하게 가라앉는 색을 그리지 않았는지!
안타깝다!
학산이 쓰다.
濱(빈)은 물가를 말한다.
窮山(궁산)은 깊은(深) 산이지만 거친(荒) 산이다.
野水(야수)는 들 밖에 흐르는 물이다.
固(고)는 부사로 본래, 본디, 원래, 전부터를 뜻하고
自(자)는 부사로 저절로, 진실로를 말한다.
寥落(요락)은 드물다, 쓸쓸하다, 적막하다는 뜻이다.
趣(취)는 정취다.
瘢痕(반흔)은 상처나 부수럼 따위가 나은 뒤 남는 자국이다.
曠(광)은 비다. 공허하다 ‘탁 트이다’를 뜻하고
埜(야)는 들판이다. 농막의 뜻으로는 서로 읽고 변두리 의미로 여라 읽는다.
澹(담)은 맑다, 조용하다, 담백하다는 뜻이다.
沈(침)은 가라앉다. 원기를 잃다, 침울하다는 뜻이다.
심사정이 그린 그림에 흘려 제발을 쓴 이는
鶴山(학산) 윤제홍(尹濟弘,1764-1840이후)이다.
윤제홍도 선비화가다.
벽파(僻派) 김달순이 같은 당파 박치원을 추증하려다
시파(時派)등이 정조의 유지에 위반된다하여 공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해가 1806년 순조6년이었는데 당시 윤제홍은 사헌부 장령 자리에 있었다.
장령은 이른바 청환직으로 젊고 기개 있는 자로 임명하는데
김달순에 대한 징토를 하지 않고 유기하였다 하여 창원으로 유배를 갔다.
10년 유배 후 제주도경차관, 낭천현감, 풍천부사를 거쳐
1840년 대사간이 된 윤제홍의 이후 기록은 없다.
벽파의 대부분은 노론이었다.
윤제홍의 기록을 보면 춘당대전시와 인연이 깊어
정조와 순조 두 임금 앞에서 치러진 시험에 합격하여 영예를 누렸으나
유배와 암행어사의 서계에 곤욕을 치루는 등 관직생활에 부침이 있었다.
그는 노론의 핵심 김창협(金昌協,1651-1708)의 계열이라
신위(申緯,1769-1845)와 가까웠다.
신위는 심사정에 대해
“옛 것을 따랐지만 자운(自運 : 그리는 이의 뜻대로 붓을 움직임)이 모자란다.”는 평을 하였다.
심사정의 이 그림에 대한 윤제홍의 평도 좋지는 않다.
심사정은 '과거시험의 부정과 연잉군 시해 가담'으로 죄인이 된 소론 심익창의 손자다.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고증과 박학의 대가
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심사정의 처소를 찾아가 나눈 대화를 적고
심사정의 그림에 대한 취지는 탁연하여 조잡한 자와 차이는 하늘과 못의 격차와 같다고 격찬했다.
당시 그림의 세계에도 당색이 영향을 줬구나 생각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노론 김창흡의 문인으로 영조 때 최고의 시인으로 불려진 이병연(1671-1751)이
79세가 되는 1749년 심사정이 이병연을 위해 그린 이른바
<계산모정도 溪疏茅亭圖>(간송미술관 소장)가 지금에도 전하고 있다.
己巳孟秋爲槎川寫 玄齋 沈頤叔
기사년(1749년) 음력7월 사천 이병연을 위하여 그리다.
현재 심이숙
신분제 사회를 지금의 기준으로 재단하기는 힘들다.
지금은 모두 성을 가져 양반의 후손들만 사는 지경이나
영.정조 당시에는 인구의 30%도 안 된 것이 양반층이다.
양반의 핏줄을 가진 이가 과거에 나가지 못한다면 삶의 선택이 급격히 줄어든다.
능호관 이인상(李麟祥,1710-1760)과 현재 심사정은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고조부가 영의정에 오른 집안 출신이다.
이인상은 서자의 증손자고, 심사정은 죄인의 손자다.
이인상은 그나마 노론인데다 서얼 등을 등용한 정조대에 벼슬을 하였지만
심사정은 죄인에다 북인-소론 출신이라 상대방의 열렬한 반대로 영조가 내린 자리도 5일 만에 물러나야했다.
둘은 모두 글씨를 잘 썼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물려받은 유전자를 최대한 살려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산 심사정.
심사정의 집안 손자뻘인 심익운(沈翼雲,1764-?)역시
이가환, 정약용과 더불어 정조 대 3대 천재로 불렸으나
심익창의 후손이라는 벽을 손가락을 잘라도 허물지 못했다.
심익운이 쓴 심사정의 묘지명을 적어본다
"청송 심씨는 그 공훈과 덕이 세상에 떨쳤다.
만사부군晩沙府君(심지원)에 이르러 더욱 번창했는데,
거사는 그의 고손자다.
거사는 태어나서 몇 해 안 되어
홀연히 사물 그리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네모난 것과 둥근 형상을 모두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어려서 일찍부터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워
수묵산수를 그렸는데,
옛 사람이 그린 화결畵訣을 보고 탐구한 뒤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여
마침내는 이제까지 해오던 방법을 크게 변화시켜
그윽하면서 소산한 데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종래의 고루한 방법을 바꾸는 데 힘써
중년 이후로는 융화천성融化天成하여,
잘 그리려고 애써 기대하지 않아도 공교롭게 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관음대사와 관성제군의 상을 그렸는데,
그것은 꿈에 본 것을 그린 것이었다.
연경에 다녀온 사신들이 말하기를
연경 시중에 거사의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돌이켜보건대 어려서부터 말년에 이를 때까지
근심과 걱정, 낙이라곤 없는 쓸쓸한 나날을 보냈으면서도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몸이 불편하여 보기에 딱할 때에도 그림물감을 풀어내면서
궁핍한 쓰라림과 천대받는 부끄러움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끝내
통유通幽의 경지, 입신入神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으니,
멀리 이국 땅에까지 널리 알려졌고,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그를 사모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거사의 그림은 이렇듯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하여 대성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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