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균와아집도에 나타난 화가들

허접떼기 2020. 10. 13. 21:51

이 그림은 여러 사람이 합작한 이른바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이 그림 상단에 적힌 내용은 이렇다.

倚几彈琴者 豹菴也 의궤탄금자 표암야

傍坐之兒 金德亨也 방좌지아 김덕형야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 강세황이고,

곁에 앉은 아이는 김덕형이다.

含烟袋而側坐者 玄齋也 함연대이측좌자 현재야

緇巾而對棋局者 毫生也 치건이대기국자 호생야

담뱃대를 물고 곁에 앉은 사람은 현재 심사정이고,

치건을 쓰고 바둑을 두는 사람은 호생관 최북이다.

對毫生而圍棋者 秋溪也 대호생이위기자 추계야

偶坐而觀棋者 烟客 우좌이관기자 연객

호생관과 마주하고 바둑을 두는 사람은 추계고,

마주 앉아 바둑을 보는 사람은 연객 허필이다.

凭几而欹坐者 筠窩 빙궤이의좌자 균와

對筠窩而吹簫者 金弘道 대균와이취소자 김홍도

안석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은 사람은 균와고,

균와와 마주하여 퉁소를 부는 사람은 단원 김홍도다.

畫人物者亦弘道 화인물자역홍도

而畫松石者卽玄齋也 이화송석자즉현재야

豹菴布置之 표암포치지

毫生渲染之 호생선염지

인물을 그린 사람은 또한 단원 김홍도이고,

소나무와 돌을 그린 사람은 곧 현재 심사정이다.

표암 강세황은 그림의 위치를 배열했고,

호생관 최북은 색칠을 했다.

所會之所乃筠窩也

소회지소내균와야

모임의 장소는 곧 균와다.

 

癸未四月旬日 烟客錄 계미사월순일 연객록

계미년(1763년, 영조39년) 4월10일 연객 허필이 적다.

 

이 그림에 이름을 적어 표시하면 아래 그림이 된다.

심사정이 1707년 허필은 1709년 최북은 1710년 이인상은 1710년 강세황은 1713년생이다.

지금처럼 나이에 맞는 공교육이 없던 시절 이들은 신분 아래 서열이 있을 뿐 그냥 동무가 될 또래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인상(1710-1760)은 나름의 동아리가 있었다.

박희병 교수는 그들을 ‘단호(丹壺) 그룹’이라 부른다.

아마도 단릉 이윤영과 능호관 이인상의 호를 집자해서 만들었나싶다.

물론 각자 반골기질이 강한 동아리였으나

심사정이나 최북 등과는 달리 지식인들이었고

나름 과거에 급제한 서울 사람들이며

친명배청의 골수 성리학파이며 노론들이었다.

이윤영(1714-1759), 오찬(1717-1751), 송문흠(1710-1752), 황경원(1709-1787), 김상숙(1717-1792), 김무택(1715-1778) 등이 그들이다.

 

이들보다 나이가 한 대 정도 빠른 이들이 정선(1676-1759) 윤두서(1668-1715) 조영석(1686-1761), 윤덕희(1685-1766) 등이고

이들보다 나이가 한 대 정도 늦은 이들이 김홍도(1745-1806?), 이인문(1745-1824?), 김응환(1742-1789) 등이다.

 

심사정은 강세황과 강세황으로 연이 닿은 이른바 안산 지역 사람과 어울렸으며 나름 존재감 있는 괴짜 최북 등과 만나 같은 동업자 간 협업도 했다.

그리고 당대 명문가의 자제로 그림 감식가이자 수장가였던 상고尙古 김광수(金光遂1699-1770), 의관직을 세습하며 당상관의 품계를 이어 부유했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1727~1797)의 후원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심사정의 그림에 제시나 글이 없어 외롭게 지냈다는 반증이라 하지만, 겸재 정선과는 사제지간이나 1740년대에는 이미 정선과 어깨를 견주며 겸현(謙玄)이라 불리며 조선에 그 이름이 높았다.

수준에 대해서도 중국풍을 벗어난 독창성이 없었다고 신위가 일갈하고 지금까지도 어느 큐레이터가 설명한다지만 심사정의 그림의 변화가 3단계로 나눠지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확장되고 개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전문가의 글도 있다.

심사정과 김홍도의 만남은 강세황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김홍도가 그림을 배우게 되는 시기에 이미 심사정은 그림에 관한한 조선의 일인자 자리에 있었다. 심사정이 강세황으로 인해 안산의 수암동에 잠시 기거하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공감이 된다. 이 그림에 그들이 만난 장소도 안산일 것이며 안산에서도 성호 이익과 그의 학통을 이은 이른바 ‘안산15학사’중 선조의 부마가 된 진주유씨 종가의 상속자이자 강세황의 처남인 유경종(柳慶種,1714-1784)의 배려가 있는 장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균와에 대한 여려 의견이 있을 뿐 아직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나로서는 강세황이나 심사정의 앞에서 안석에 기대어 몸을 비스듬 누울 수 있는 사람, 게다가 강세황과 심사정 허필이 쓴 사방관이 아닌 정자관을 쓴 이 사람은 이들과 신분이 현저히 차이가 나거나 나이가 비슷한 연배의 인물일 것으로 사료된다.

아울러 추계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모른다.

그리고 김홍도가 상투를 튼 반면 아직 갈래머리를 하고 있는 김덕형은 ‘꽃에 미쳤다’로 유명한 화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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