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판교 정섭의 죽석(竹石), 그림과 글

허접떼기 2020. 1. 1. 18:29


 (정판교의 <죽석(竹石)>이다. 이른바 육분반서체로 쓴 화제가 멋있다.)


대나무를 비롯한 사군자를 잘 그렸다는 판교의 그림에서는 백성을 위하는 따뜻함이 묻어난다.

자유롭고 개성이 넘쳤다는 판교의 삶은 문인에게 흔히 보이는 모범적이고 형식적인 경향을 벗어나 천진하고 낭만적인 멋을 추구했다.

아울러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진솔하게 표현하고 사회의 현실에 접근해 백성의 고통이나 탐욕스러운 관리의 폭정을 서슴없이 폭로했다.

책 읽을 때는 밥 먹을 때도 잊었다는 판교 정섭의 그림을 블로깅하기 머뭇거린 이유는 그가 청나라 사람 즉 중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게 난득호도(難得糊塗)로 각인된 이 분의 그림은 솔직히 참 보기 좋았다,

 

정섭(鄭燮,1693-강희32 ~ 1765-건륭30)은 중국 청나라 중기의 문인화가다.

자는 극유(克柔), 호는 판교(板橋). 강소성(江蘇省) 양주[揚州] 사람이다.

173644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으며, 산동성(山東省) 범현(笵縣), 이어서 유현(濰縣)의 지사를 역임했고

유현에 부임해 대기근이 들었을 때 관부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그러나 1753년 고관의 심기를 건드려 결국 관직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떠나는 날 백성은 울음을 터뜨렸으며 죽은 사람에게나 세워주는 사당까지 만들었다(이를 생사(生祠)라 한다).

관직을 그만둔 후 정섭은 양주에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는데, 서민과 어울리며 자유롭고 호방하게 살았다.

당시 양주 사람은 정섭처럼 권세를 뜬구름으로 여기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고고하게 살아간

8명의 괴짜들을 일컬어 양주팔괴(揚八怪)라 했고, 당연 정섭도 그중 하나다.

명대의 문인화가 서위(徐渭)를 흠모하여 격식을 탈피한 서위의 수묵화와 화훼화를 배웠다 한다.

그의 서체는 한나라 비문에 대한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와 전서, 예서를 섞은, 자칭 <6분반서(六分半書)>라는 기고체(奇古體)가 뛰어났고,

그림은 난죽(蘭竹)이 유명하다.

시는 전통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웠다. 작품으로 <판교집(板橋集)>이 있다.

, , 화 모두 뛰어난 삼절(三節)이었다.

 

요컨대, 붓을 대기 전에 생각하는 것이 정해진 법칙이라지만, 그림의 멋이란 정해진 법칙 밖에 존재하는 영감(화기)이다. 어찌 유독 대나무를 그리는 것뿐이랴!

(總之, 意在筆先者, 定則也. 趣在法外者, 化機也, 獨畵竹乎哉!)”

 

정판교는 대상을 대하는 작가의 영감을 중시했다. 정해진 구도대로 그리는 것은 법칙이지, 예술적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광달자방(狂達自放)', 즉 광기와 자유!

이것이 바로 정판교가 말한 예술정신의 핵심이다.

 

이 그림에 판교가 쓴 시는 다음과 같다.

 

咬定靑山不放鬆 교정청산불방송

立根原在破巖中 입근원재파암중

千磨萬擊還堅勁 천마만격환견경

任爾東西南北風 임이동서남북풍

 

咬定(교정)은 잘라 말하다, 결심하다. 악물다 이고, 는 물다 는 뜻이다.

放鬆(방송)은 풀어주다, 느슨하게 하다이다. 중국에서는 으로 쓰는데 헐겁다, 느슨하다는 뜻이다.

立根(입근)은 뿌리를 내리다는 뜻일 테고 어디서는 主根이라 썼던데 초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일 터이고, 根原하는 것이니 명사인 主根은 아니다.

堅勁(견경)은 단단하고 강하다는 뜻(堅定挺拔)이다.

任爾(임이)任憑爾(임빙이)와 같으니 네 마음대로 하게 하다 는 뜻이다.

 

그래서 풀어 이리 적는다.

 

청산을 악물고는 놓아주지 않았고,

뿌리를 쪼개진 바위틈에 세웠도다.

천만 번 갈고 쳐도 여전히 단단하니,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람이야 불든 말든.



이 시를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이 좋아한다. 글자를 바꿔 그가 아버지때문에 섬서성 연안으로 하향(下鄕)한 기억을 바탕으로 '민중속으로'가겠다는 의지를 되새겼다한다.

정판교가 같은 시제로 그린 그림들을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