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대 왕들의 시문집인『열성어제』에 무려 170편에 이르는 서화와 관련된 시문을 남긴 숙종(1661-1720)!
14살에 왕에 올라 향년 60에 죽을 때까지 46년 동안 재위한 임금.
할아버지인 인조 때부터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이어졌는데
그의 나이 20살이 되는 해인 1680년 경신대출척부터 1689년 기사환국과 1694년 갑술환국까지
궁중의 갈등으로 기인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사화를 주도한 임금.
곁들여 인현왕후와 장희빈과 숙빈 최씨와의 로맨스로 사극에 단골소재가 되는 임금.
왜란과 호란의 뒷청소가 많이 이루어져 문화재 복원과 토지측량인 양전이 마무리되고
상평통보로 대변되는 상업의 발달과 금위영 신설로 오군영체제 확립을 이룬 임금.
사육신, 단종, 소현세자 빈의 신원을 복원하고
각 지방에 3백 개 정도 새로운 사원 중에 131개에 사액을 내려 당쟁과 특권의 온상을 키운 임금.
그리고 사화 도중에 나타나 끝내 잡히지 않은 장길산이 오버랩되는 임금이다.
아울러 숙종은 서화 애호와 수집, 후원, 어진제작과 진전의 복구 등을 통하여
영, 정조대의 서화 발달의 밑바탕을 구축하였고, 조선 후기 문예부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받는다.
(떨어진 이의 얼굴은 수염이 특이한 공재 윤두서처럼 보인다)
흰 나귀에서 진단(陳摶)이란 이름을 가진 이가 웃는 얼굴로 떨어지는 모습을 그려
진단타려도(陳摶墮驢圖)라는 이름을 가진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윤두서(1668-1715)라 한다.
윤선도의 증손으로 1668년 해남에서 태어나서, 숙종 41년(1715)에 녹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의 외증조부이고 호는 공재(恭齋)다.
경신년 남인이 몰락하던 해 1680년 서울로 올라와 숙종 19년(1693)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다음 해가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또 한 번 몰락하였던 때다.
공재의 형이 국문으로 죽었고 양부를 시작으로 20년 동안 줄창 이어진 집안의 상사(喪事)를 종손으로서 치렀다.
낙향을 하여 2년 만에 죽은데다 전염병마저 돌아 그 수습도 힘들었다한다.
해남윤씨는 윤선도 때부터 골수 남인 집안이다.
그는 평생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고
선비화가로 유명해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3재로 불렸다.
공재의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은
공재의 자손이면 수기(秀氣)를 지녔을 것인데 불행한 시대로 번창하지 못함을 운명으로 받아드렸다.
『청죽화사(聽竹畵史)』를 써 화론(畵論)에 일가견 있던 남태응은
공재를 이징과 김명국과 더불어 조선 3대화가라 불렀다.
『소치실록(小痴實錄)』에서 허련은
추사 김정희가 조선은 공재로부터 옛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썼다.
서예에 있어서도 이서와 함께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창안하여
조선후기 서예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해남윤씨의 종손으로 막대한 부와 높은 학풍과 명예를 가진 집안출신이면서
죽기 전까지 백성 구휼에 앞선 이었다.
이 그림이 공재의 것인지에 대한 이견도 있다.
공재의 삶은 거의 숙종의 재위기간에 있다.
이 그림에 숙종이 제(題)하고 쓴 글은 이렇다.
希夷何事笏鞍徙(희이하사홀안사) 희이선생 무슨 일로 갑자기 안장에서 떨어졌나!
非醉非眠別有喜(비취비면별유희) 취해서도 졸아서도 아니고 다른 기쁨이 있다네.
夾馬徵祥眞主出(협마징상진주출) 협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왔으니
從今天下可無悝(종금천하가무리) 이제부터 온 천하에 근심은 없으리라.
歲在乙未中秋上浣題(세재을미중추상완제) 을미년(1715년) 8월 상순에 쓰다.
希夷(희이)는 송(宋) 태종이 陳摶(진단-872~989)에게 내린 호(號)다.
夾馬(협마)는 낙양에 있는 협마영(夾馬營)으로 송 태조 조광윤이 태어난 곳이다.
悝(리)는 근심이란 뜻이다.
이제 希夷(희이) 진단(陳摶,872~989)이 나귀에서 떨어진 기록에 대해 알아본다.
『동도사략(東都事略)』은 남송(南宋) 왕칭(王稱,생몰년 미상)이 지은 기전체 사서이다.
王稱은 경원(慶元) 연간(1195∼1200)에 이부낭중(吏部郞中)을 지냈고,
이후 관직이 직비각(直秘閣)에 이르렀다.
『東都事略』은 총 130권으로 태조(太祖)부터 흠종(欽宗)까지 북송(北宋) 9대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118권에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陳摶)嘗乘白驢欲入汴 中途聞 (宋)太祖登极 大笑墮驢曰天下于是定矣 (진단)상승백려욕입변 중도문 (송)태조등겁 대소타려왈천하우시정의
일찍이 흰 나귀를 타고 변주(汴州)에 가려는 길에 태조가 안장에 올랐다는(등극했다는)소식을 듣고 크게 웃다가 나귀에서 떨어지며 하는 말이 “천하가 이제 안정되리라” 했다. *변주는 지금의 하남성 개봉일대를 말한다. |
선천학(先天學)을 창시하고 만물은 모두 태극(太極)에서 말미암아 변화 생성된다고 주장했던
소옹(邵雍)의 아들로 상수학(象數學)을 계승한 소백온(邵伯溫,1057~1134)
의『소씨문견록(邵氏聞見錄)』 권7(卷七)에 이리 적혀있다.
(陳摶)嘗乘白騾 從惡少年數百 欲入汴州 中途聞藝祖登极 大笑墜白騾曰天下于是定矣 (진단)상승백라 종악소년수백 욕인변주 중도문예조등겁 대소추백라왈천하우시정의
일찍이 흰 노새를 타면 어린 얘 수백이 따라왔는데 변주에 가려는 길에 예조의 등극을 듣고는 크게 웃다 흰 노새에서 떨어지며 “천하는 이제 평정하다”고 말했다. *예조는 송 태조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
명말청초 유명한 시인 전겸익(錢謙益)의
《서대우왕문조왕시견하봉답(徐大于王聞詔枉詩見賀奉答)》之二에 이리 적었다.
騎驢倒墮君休笑 聖世今眞作幸人 (기려도타군휴소 성세금진작행인)
나귀 타다 넘어 떨어진 그대 웃음을 그치시게 태평성세 이제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되셨으니 |
이후 기려도타(騎驢倒墮)는 태평성대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진단은 자(字)가 도남(圖南)이고 호(號)는 부요자(扶搖子)이며
희이선생(希夷先生)이란 호를 송 태종에게 받았다.
하남성 녹읍현에서 태어났다. 오대송초(五代宋初)에 저명한 도교학자다.
한대(漢代)이래로 상수학(象數學)의 전통을 이었고 노자에서 시작되는 무위사상을 이었다.
도교 수련과 유가수양은 물론 불가의 선관(禪觀)에도 일가를 이루어
후대에 그를 진단노조(陳摶老祖), 희이조사(希夷祖師)라 불렀으며
특히나 잠을 자면서도 천기를 받아들인다하여 수선(睡仙)으로도 불린다.
무당산 구실암에 은거하다 화산 운태관으로 옮겨 많은 저술활동을 하여
중국전통신비문화의 일대종사가 된다. 믿기 힘들지만 무려 119살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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