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석촌거사 윤용구의 묵죽에 적힌 제시

허접떼기 2019. 8. 2. 13:09

위 그림은 간송미술관에서 2011년에 전시한 사군자 중의 하나다.

 

이를 그린

윤용구(尹用求,1853-1939)의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石村) 해관(海觀) 수간(睡幹) 장위산인(獐位山人)이다.

순조의 적녀 중 셋째 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1822-1844)의 남편인

남녕위 윤의선(宜善, 1823-1887)의 조카이자 양자다.

1871(고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법부·탁지부·내무부 등 대신 자리를 십 수회 배명(拜命)받았지만

취임하지 않고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 은거하면서 장위산인이라 자호하였다.


경술국치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을 수여하였으나 거절하고

서화와 거문고, 바둑을 두며, 두문불출하였다고 한다.

글씨는 해서·행서를 많이 썼고 그림은 난과 대를 잘 그렸다.

금석문으로 과천의 문간공한장석신도비(文簡公韓章錫神道碑)

광주(廣州)선성군무생이공신도비(宣城君茂生李公神道碑)가 있으며,

선암사 입구의 강선루(降仙樓) 현판 등을 남겼다.

그림은 죽도(竹圖)(개인소장)묵죽(墨竹)(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한국서예백년전>에 출품된 행서 작품이 특징 있는 자기(字氣)는 있으나,

강약의 변화가 부자연스럽고 행의(行意)의 수필처(收筆處) 획들에 군더더기가 많아

격이 높지 못하다는 평이 있다.

 

누구의 평이던 나로서는 가소롭기 그지없다.

아울러 내 사적인 경험에 비추어도 글씨와 그림이 훌륭하다하여

그 인격도 높을 것이라는 추사류의 판단에 절대 긍정할 수 없다.


이 그림에 적은 제시(題詩)를 이렇게 해초한다.

夜來風雨急(야래풍우급) : 밤이 되자 비바람이 갑작스러워

臥聽老龍吟(와청노룡음) : 누워 늙은 용의 읊조림을 듣노라.

石村居士(석촌거사) 用求(용구)

 

첫 구 마지막 글자를 (집 실)로 해초하는 분도 계시는 데

초서라도 갓머리()는 분명히 보이는데 모양이 아니고

백거이(白居易) 惜落花(석낙화 : 지는 꽃이 애닲아)라는 시에

이 구절이 보여 나는 ()으로 본다.

 

백거이의 시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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惜落花(석낙화)-백거이(白居易)
夜來風雨急(야래풍우급) : 밤이 되자 비바람이 갑작스러워
無復舊花林(무복구화림) : 옛 꽃 숲을 되돌리지 못하고
枝上三分落(지상삼분락) : 가지 위의 삼분의 일이 떨어져
園中二寸深(원중이촌심) : 정원 안이 두 치나 높아졌다.


日斜啼鳥思(일사제조사) : 해가 기울어 우짖는 새들의 마음은
春盡老人心(춘진노인심) : 봄이 다하는 때 늙은이의 마음이라
莫怪添盃飮(막괴첨배음) : 첨작을 마신다고 괴이하다 말라
情多酒不禁(정다주불금) : 정이 많아 술을 금하지 못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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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시에서 대나무가 비바람에 흔들리며 부딪히는 소리를

龍吟(용음)이라 표현한 글은 많다.

용음의 사전적 의미는

용이 소리를 길게 뺌  ②무악(舞樂)의 가락의 하나  

금곡(琴曲)의 이름  ④피리나 거문고의 음향(音響)이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편자 미상의 음담패설이 많은 설화집

고금소총(古今笑叢)에 이런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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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讖(시참 : 시가 예언이 되다)
 
어떤 사람이 여덟 살 난 아들에게 글공부를 시키면서,
항상 열심히 하지 않고 노는 것 같아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들에 대해 뭐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늘 속이 편치 않았다.
 
하루는 멀리 있는 친구가 초청을 해서 갔더니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술상을 대접하면서

역시 여덟 살인 아들 자랑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들을 불러 시를 지어보라고 하니,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烽火疎星落(봉화소성락) 鐘聲老龍吟(종성노룡음)
봉홧불 오르니 엉성한 별이 떨어지고

종소리 울리니 늙은 용이 읊조리는 것 같구나

이에 친구는 자기 아들이 천재와 같은 재능을 가졌다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해댔다.
그러자 이 사람은 마음이 상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들을 불러 오늘 친구의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니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 그 아이가 어떤 시를 지었는데요?"
그리하여 이 사람은 그 시를 들려주고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그렇게 훌륭한 시를 못 짓는 것 같아 걱정이란다." 하면서 
평소 아들에게 가지고 있었던 불만스러운 마음을 토로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버지 이것은 매우 불길한 시입니다.

'엉성한 별이 떨어진다(疎星落)'고 한 구절은

 그 아이가 얼마 있지 않아 죽을 징조이고,

'늙은 용이 읊조린다(老龍吟)' 란 구절은

 그 아이의 부친이 통곡할 징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불길한 징조를 가진 시가 아닐는지요?"


이 말을 들은 이 사람은 깜짝 놀랐다

평소 시도 지을 줄 모르는 것으로 알았던 자기 아들이

이러한 풀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곧 이 사람은 아들을 보고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시를 짓겠느냐고 묻자,
아들은 다음과 같이 고치면 좋겠다고 했다.

 
烽火千里信(봉화천리신) 鐘聲萬人定(종성만인정)
봉홧불은 천리 밖에까지 소식을 알리고

종소리는 만인을 안정시키도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그제야 아들이 대단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크게 칭찬하였다.
 
한편, 친구의 아들은 과연 얼마 있지 않아 죽었고

친구는 그 슬픔에 오랫동안 통곡했다 하니,

아들의 시에 대한 해석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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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석촌 윤용구가 그림을 그리고 적은 시를 보면서

어쩌면 석촌도 졸지어 내우외환으로 풍비박산된 500년 된 늙은 나라의 울음을 적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