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일주 김진우의 묵죽에 적힌 <소동파죽>

허접떼기 2019. 7. 20. 02:09


이 그림은 일주(一州) 김진우(金振宇)의 그림이다.

일주 김진우의 또 다른 호가 금강산인(金剛山人)이다.



1883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난 그의 행적을 네이버와 그를 연구한 간송미술관 최완수의 글에서 찾아 보았다.

189512세에 유인석의 의병에 부친과 참가하고 서간도행에 동참하다가

1915년 의암이 죽자 조국으로 들어왔다고 하는 데 유인석의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1917년경 서울에 작은 서화상을 차려 그림을 팔아 독립운동에 보탰다고 한다.

1919년 초여름에 난초 그림을 남기고 상해에 도착하여

 818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제6차에 강원도 대표 의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212월 박은식 등 독립운동가 15인과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해

무능한 임정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장했다.

1921년 조선일보 정낙륜의 체포기사에 언급이 되고

독립운동가 이종률의 회고록에 '대나무를 그려 군자금을 댔다'는 구절이 보인다.

19216월 귀국길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경성고법에서 3년형을 언도받아 서흥감옥에 수감되었다.

옥봉스님(1913-2010)의 회고에 따르면 죽치는 연습을 감옥에서 한없이 했다한다.

그 이후로 일주의 대나무 그림이 바뀌었다고 한다.

1923년 신문사의 신년 휘호를 그리고

1926년 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을 그려내고

특선과 입선을 거듭해 당대 사군자 대가로 인정받고 후진도 양성했다.

1930년대에 전업작가로 활동하면서 상당한 수의 작품을 제작 판매하였다.

1931년부터 일제는 사군자를 미술대회 출품에서 제외하였다.

1933년 대구, 대전서화회를 열었고

그해 완성되어 간송미술관이 수장하고 있는 이 그림에 최완수는

대나무가 아니라 예리하고 강인한 금속제의 도검과 창날, 도끼 등

살상용 병장기를 집합시켜 놓은 듯 삼엄하다 평했다.

1934년 개성휘호회를 가졌고

1941년 조선일보 후원 문인서화전에 대병풍 <죽림(竹林)>을 출품했다.

1944년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재무담당으로 참가하였던 일주는

1947년 여운형의 암살 이후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1950년 동족상잔에 서울을 벗어나지 않아 인민군의 부역자로 체포되어 12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의 일생을 무덤덤히 사실로 증거된 내용을 적었으나 그에 얽힌 일화는 많다.

스스로 스승을 둔 적이 없다고 하였으나 김규진의 서화연구회에 참가하였고

원대화가와 조선의 탄은의 그림을 보고 배웠다고 한다.


1933년에 그렸다는 이 그림에 적은 시제는 이렇다.


一片湘雲濕未乾 (일편상운습미건)

春風吹下玉琅玕 (춘풍취하옥랑간)

强扶殘醉揮唫筆 (강부잔취휘음필)

簾帳蕭蕭翠雨寒 (염장소소취우한) 金剛山人(금강산인)

 

한조각 상강의 구름은 젖어 마르지 않은데
봄바람 부는 아래 옥 같은 푸른 대밭.
굳게 남은 취기를 붙들어 읊는 붓을 휘두르니

대발 장막 쓸쓸하고 푸른 비 차갑구나.

 

이 시의 원작자는 황공망이다.

황공망(黃公望,1269 ~ 1354)의 ()는 자구(子久)이며,

()대치(大痴대치도인(大痴道人일봉도인(一峰道人) 등이다.

예찬(倪瓚), 오진(呉鎭, 1280-1354), 왕몽(王蒙)과 더불어

 중국 원나라 시대의 ‘4대 화가로 꼽힌다.

소치 허련이 진도에 운림산방을 지은 유래가 바로 이들에게 있다,

황공망의 호가 대치이고 예찬의 호가 운림이다.

명대(明代) 도종의(陶宗儀)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에는

황공망의 본래 성이 육() 씨이고 이름은 견()으로,

평강로 상숙주(平江路常熟州, 지금의 강소성 소주 상숙시(江蘇省 蘇州 常熟市) 출신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절강성 온주(浙江省 温州)의 영가 황씨(永嘉黄氏)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황공망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황공망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학문에 훌륭한 성취를 이루었으나

원이 몽고족이 세운 나라이니 남송(南宋) 지역을 차별하여

40세가 넘어서야 소주의 말단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1315년 징세부정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석방된 뒤에 도교의 일파인 전진교(全眞敎)의 도사(道士)가 되어 상숙(常熟)의 우산(虞山) 기슭에 은거했다.

황공망은 조맹부(趙孟頫)의 영향을 받아 50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화법(畵法)은 조맹부보다는

오대시대(五代時代) 남당(南唐)의 화가들인 동원(董源)과 거연(巨然)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이들을 본보기로 삼아 남종화(南宗畵)의 표현형식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그림은 웅대한 자연의 골격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수묵화 본연의 간결한 묘사와 수묵의 농담(濃淡)을 이용한 세밀한 표현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1347년에서 1350년 사이에 절강성 전당강(錢唐江] 상류의 부춘강(富春江)을 배경으로 그린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역대 산수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신품(神品)’이라는 평가를 받고

중국 역사상 10대 그림중 하나로 쳐준다.

부춘산거도는 유언에 따라 불에 태워질 뻔하다 둘로 나뉘어졌고

중국과 대만이 각각 나눠진 그림을 국보로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황공망의 蘇東坡竹(소동파죽, 즉 소동파의 대나무)라는 제하를 둔 시의 압운은 이다.

같은 제하에 오진을 운으로 지은 시가 있다.

 

晴梢初放葉可數(청초초방엽가수)

新粉纔消露未乾(신분재소로미건)

太似美人無俗韻(태사미인무속운)

清風徐灑碧琅玕(청풍서쇄벽랑간)

 

날이 개니 가지 끝에 첨으로 잎이 셀만큼 피고

새 분가루가 겨우 사라져도 이슬은 마르지 않네.

문왕의 후비 태사는 미인이고 속된 음운이 없듯이

맑은 바람이 천천히 푸른 대밭에 분다.

 

오진과 더불어 황공망이 제목으로 언급한 소동파는

중국의 대시인일 뿐만 아니라 서예가로서도 송대(宋代)에서 첫손가락에 꼽혔다.

평소 그는 대나무를 몹시 사랑했는데 유명한 어잠승록균헌시(於潛僧綠筠軒詩)를 남기고 있다.

 

可使食無肉 고기가 없어도 식사는 할 수 있지만
不可居無竹 대나무가 없으면 살 수 없네
無肉令人瘦 고기가 없으면 사람은 여위게 되지만
無竹令人俗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은 속되게 되네
人瘦尙可肥 사람은 여위어도 다시 살찔 수 있지만
俗士不可醫 속된 것은 도저히 고칠 수 없다네
傍人笑此言 사람들이 이 말을 비웃어
此高還似癡 고상하다 못해 바보 같다 하겠지만
若待此君仍大嚼 만약 대나무를 마주하고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면
世間那有楊州鶴 세간에서 어찌 양주의 학을 부러워하리오.

 

이 시는 대나무를 읊은 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일 뿐 아니라

소동파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희망은 고기 먹는 일과 대나무와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일인데

이 두 가지가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10만 냥을 허리에 꿰차고 학을 타고 신선이 되어 간다는 양주의 학을 부러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소동파에게 어느 날 묵죽화를 그려 달라 의뢰해온 사람이 있었다.

그 부탁에 따라 그림을 그리려고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먹이 떨어져서

부득이 마침 옆에 있던 붉은 먹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자 그림을 부탁했던 사람이 의아스러운 얼굴상을 하고서

"이 세상에 붉은 대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동파는 그 자리에서 답하기를

"그러면 이 세상에 검은 대는 있는가?"라고 하니

손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붉은 대나무그림을 그대로 받아 돌아갔다.


그런데 그로부터 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때까지 없었던 아들을 낳고 사업은 크게 성공하여 왕후(王侯)를 능가할 부자가 되고

사회로부터도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소동파의 집에 몰려와서

붉은 대나무그림을 그려서 받아 갔는데

이상하게도 그 그림을 받아간 사람들은 모두 생각지 않았던 행운을 얻게 되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주죽화(朱竹畵)가 지금도 경사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이 고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일주 김진우가 묵죽에 적은 황공망의 <소동파죽>을 통해 소동파의 대나무 사랑까지 적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