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최북의 석림묘옥과 명.청대 화보

허접떼기 2019. 2. 3. 16:24



이동양(李東陽1447-1516)明代 시인이자 정치가이다.

는 빈지(賓之). 호는 서애(西涯)이고 17세에 진사시에 합격 후

세명의 황제를 50년간 이어 모시며 호부 상서(尙書), 근신전(謹身殿) 대학사(大學士)를 지냈다.

이익이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동양을 장거정(張居正)과 더불어 명대 간신(明代 奸臣)으로 평했다.

사실 무종(武宗)때 역적 환관 유근(劉瑾1451-1510)의 편에 서기도 했다.

성당(盛唐)시기의 시풍을 추구하되 음조를 강조했다는 그는

회록당집(懷麓堂集), 회록당시화(懷麓堂詩話)를 남겼다.

그의 문집은 조선 중종 연간(1506-1544)회록당문고(懷麓堂文詩藁)로 출간되기도 했다 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유명세가 있었다는 것이다.


회록당집(懷麓堂集)20에 제화이절(題畵二絶)을 제목으로 쓴 시가 있다.



風落空山老樹秋 풍락공산노수추/ 바람도 사라진 빈산 노목은 시름겹고

斷溪幽咽水空流 단계유열수공류/ 나뉜 시내는 졸졸졸 무심히 흐르네.

何因得共幽人話 하인득공유인화/ 무엇 때문에 은자와 이야기 하려는 건가?

消盡西窓一夜愁 소진서창일야수/ 서창에서 하룻밤 새 근심을 모두 없애리라!

 

隱隱幽巖曲曲泉 은은유암곡곡천/ 은은히 구석진 바위, 굽이굽이 흐르는 샘

石林茅屋兩三椽 석림모옥양삼연/ 돌 숲 초가집 두세 개 서까래

平生不盡江山興 평생부진강산흥/ 평생, 강산의 흥취를 다하지 못하는데,

只是丹青已可憐 지시단청이가련/ 그저 그림뿐이니 가엽구나!

     

幽咽(유열) ; 졸졸 흐르는, 흐느껴 우는

兩三椽(양삼연) : 서까래가 두세 개. 작은 집.


쓸쓸한 산과 무심한 계곡에 사는 현명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근심을 죄다 털고 싶고,

소박하게 자연에 사는 기쁨으로 사는데, 사람들은 부귀 영화를 쫒으니 가련하다는 것이다.

  

그림의 제목은 "석림묘옥(石林茆屋)"이다.

그림을 소장하는 자가 그림의 이름을 짓고 분류하고 더러 전시하는 것이니

제목이 이렇다 저렇다  할 이유도 없고

글에 모옥(茅屋)이 아니라 묘옥(茆屋)이라 칠칠선생이 쓰셨으니 토를 달 것도 아니다. 

隱隱幽岩曲曲泉 은은유암곡곡천/ 은은히 구석진 바위, 굽이굽이 흐르는 샘

石林茆屋兩三椽 석림모옥양삼연/ 돌 숲 초가집 두세 개 서까래

平生不盡江山興 평생부진강산흥/ 평생 강산의 흥취를 다하지 못했도다.

只是丹青已可憐 지시단청이가련/ 그저 그림뿐이니 가엽구나!

 

歲戊仲夏 三奇齎 寫

때는 1758(무인년) 음력5월 삼기재가 그림.


이동양의 원본과 달리 암(巖)을 암(岩)으로, 모(茅)를 묘(茆)로 썼지만 실수라 할 일도 아니다.


뜻은 같은 것이고, 자의적으로 순서도 바꾸고 다른 글자도 넣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七七은 강세황(姜世晃1713-1791)에게 그려준 부채에서는 이동양의 이 시를 원래대로 썼다.

아울러 구도는 <고씨화보>와 <명공선보>에 실린 그림과 같다. 아래에 적었다.


仲夏는 오월(午月), 포월(蒲月)으로도 부른다. 음력 5월이다.

 

1748(무진년) 통신사 일행과 함께 일본에 있었던 七七은 일본에서도 그림을 그려 주었는 데

낙관의 호를 거기재(居基齎)로 썼다. ‘그냥 거기 산다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삼기재는 거기재에서 파생된 듯하다.

삼기재의 삼기가 세 가지 이상한 것’이라는 뜻이니, 그게 무엇 무엇인지 궁금하다.


1757가을에 칠칠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에 삼기재라는 호를 썼다.

석림묘옥과 추경산수도, 두 그림의 바위, 언덕, 산등성이는 '미점준'이라는 같은 방법을 써 그렸다 한다.

간지의 천간이 무()인 해는 일본을 다녀온 1748년과 그 뒤부터 10년씩 더한 해이니

1758, 1768, 1778년 중 하나일 것이다.

칠칠은 말년에 호생관이란 호를 썼다. 

호구지책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1770년 이후부터 칠칠의 경제적 후원가였던 성호 이익의 여주 이씨 집안이 무너져 갔다.

그 이전 1768년 칠칠의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 그림은 1758년 최북의 나이 47세로 추정되는 무인(戊寅)년이라 비정(比定)해본다.


장백운선명공선보(張白雲選名公扇譜)

명말 고당(古塘) 장백운(자는 백운, 이름은 장용장(張龍章))역대 유명인사의 부채그림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은(이하 名公扇譜) 만력연간(萬曆年間) 항주(杭州) 청회재(淸繪齋)에서 출판된 것과

희종(熹宗) 천개연간(天啓年間1621-1627)에 황봉지(黃鳳池)가 집아재(集雅齋)에서 재출간한

집아재화보(集雅齋畵譜)가 있다.

조선 중기 강세황의 처남집안인 류경용(柳慶容1718-1753)이 소장한 것이 남아있다.

이 책의 한 줄기의 물에 양 언덕(一水兩岸)에 강변누각(江邊樓閣)’이라는 기본 구도는 조선후기에 널리 퍼졌다


     <명공선보 내 이동양의 시를 화제로 쓴 그림>

 

17세기 초부터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한 명·청대 각종 화보(畵譜)의 영향으로 남종화의 전파는 가속화되었다.

 

우리나라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선에 들어온 것은

고병(顧炳)고씨역대명공화보(顧氏歷代名公畵譜扇譜)』가 있다.(이하 약칭 고씨화보, 1603년 간행),

4세기 동진의 고개지(顧愷之, 348-409)에서 명나라 동기창(董其昌 1555-1636)까지 중국화가 그림 106점이 실려 있다.

그림과 함께 화가의 간략한 전기(傳記)를 싣고 있어 화론서 역할도 했다.

남종화 계열에 들어가지 않는 화가의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남종 문인화의 전파보다

더 넓은 의미로 중국 화법의 전파’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윤두서(尹斗緖)가 생전에 두고 본 이 책이 남아 전한다.


 < 미우인(米友仁)의 산수도 고씨화보 제90도>         <고극공(高克恭)의 미법산수도 고씨화보 제142도>


七七선생은 이런 화보를 보고 구도를 잡아 그림을 그린 것 같다. 


당시화보(唐詩畵譜)(萬曆年間 1573-1619)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이 화보에 1606(선조 39) 조선에 왔던 주지번(朱之蕃)의 서문이 있고,

강세황(姜世晃)이 소장했다고 전하므로 <고씨화보>보다 조금 늦게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5 <죽수계정(竹樹谿亭)>의 구도는 윤두서, 강세황, 심사정, 이인상의 그림에서 확인된다.


호정언(胡正言1582-1673)의 판화로 제작된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1627)<십죽재전보(十竹齋箋譜)>(1644)가 있다.

강세황이 이 화보를 모방하였고,심사정은 이 책을 각별히 여겼다 한다.


그리고 청나라 초 이어(李漁, 1611-1680)가 자기 별장 개자원에서

1679년과 1701, 두 해에 3집으로 완간된 개자원화보(芥子園畵傳)』가 있다.

역대 화법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한다는 목적으로 편찬된 화보라 한다.

강세황의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는 이 책에 수록된 심주의 그림을 모방한 것이다.

편찬된 시기는 이미 남종화가 중국 회화의 정통이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이후였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화가들은 대개 남종화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조선에서 남종화가 크게 유행한 당시에는 그것을 하나의 畫派라는 개념보다는 양식적인 개념에서 이해한 면이 강하였다.

  

윤두서(尹斗緖), 정선(鄭敾), 조영석(趙榮祏), 강세황(姜世晃), 최북(崔北), 정수영(鄭遂榮),

김홍도(金弘道), 이인상(李麟祥) 등이 전래된 화보의 구도나 준법을 모방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19세기에는 18세기에 형성된 조선 남종화의 기초 위에서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와 그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남종화의 세계가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도 물론 문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새로운 문화계층으로 성장한 중인(中人) 화가들도 남종화의 성장에 큰 몫을 하였다.

대표적인 문인화가로는 정수영(鄭遂榮), 이방운(李昉運), 신위(申緯), 윤제홍(尹濟弘),

그리고 중인화가로 조희룡(趙熙龍), 전기(田琦), 허련(許鍊) 등을 들 수 있다.

18세기 산수화에서 중국 여러 남종화가들의 양식을 답습하였다면,

19세기에는 주로 황공망(黃公望 1269-1354)과 예찬(齯瓚 1301-1374),

그리고 중국 북송의 미불(米芾 1051-1107),그 아들인 미우인(米友仁)이 창시한 산수화풍인

미가산수(米家山水)'로 좁아졌다.

 

미불은 특이재료 사용과 번수(礬水) 대신 선염(渲梁)을 이용해서

당대(唐代) 발묵(潑墨)의 효과를 꾀하고,

중국 오대 남당(南唐)에서 북송(北宋)까지 살았다는, '남종 산수화' 화파 창시자

동원(董源)의 거칠고 방종한 수묵화법을 썼다고 한다.

 

많은 분들이 중국의 화보가 조선 후기 그림에 끼친 영향에 대해 연구를 했다.

그중 몇 몇 분들의 논문을 읽어보았다.

그림을 보는 안목의 깊이를 가졌으면 히는 바람과 달리 한편에서는

또 다른 목책안의 세상을 엿본다 것만으로도 두렵다.

조선 후기 사의적인 산수화가 내게 주는 감동은 크지만, 쇄국적 기쁨은 아닐까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