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최북의 그림 속 조맹부의 즉사이수

허접떼기 2019. 2. 8. 20:18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된 그림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되었다하여 박물관내 소장 목록에서 찾았다.

누군가의 블로그 글을 보니 제목이 <북창한사도(北窓閒寫圖)>라 하고 <제가화첩>내에 있다고 하였으나

나는 찾을 수 없었다.

칠칠 최북무주사람이다.

무주에 가면 최북로라는 길이 있고

일제강점기 문학비평가 눌인(訥人) 김환태와 더불어 기념하여 지은 <김환태문학관 최북미술관>이 있다.

그곳에 이 그림이 있다. 물론 모사본이다.

최북미술관은 이그림을 '고사시화'라 이름 붙혔다.

 

칠칠께서 이 그림에 화제를 이렇게 쓰셨다.

北窗時有涼風至閒寫黃庭一兩章 毫生館

호생관(毫生館)이란 글씨아래 네모진 낙관안의 글자도 같은 호생관이다.


이 글은 조맹부가 지은 시 즉사이수(卽事二首)의 일부다.

 

即事二首

   

(  )은 달리 적힌 글자다.


湘簾疏()織浪紋稀상렴소()직낭문희

 죽으로 짠 발은 직물이 성글어(가늘어) 물결 무늬가 드물고

白苧新裁暑氣微백저신재서기미

  모시풀로 새로 짠 옷은 더운 기운이 적다.

庭院日長賓客退정원일장빈객퇴

  원에 해가 길어 손님들이 물러나자

(滿)池芳草燕交飛()지방초연교비

  기로운 풀이 못을 둘렀고(못에 가득하고), 제비는 오가며 난다.

 

古墨輕磨滿几香고묵경마만궤향

 오랜 묵을 가벼이 가니 탁자에 향이 그득하고

硯池新浴燦生(照人)연지신욕찬생(조인)

 벼룻물 새로 씻으니 찬란히 빛이 나네(사람의 얼굴을 비추네)

北窗時有涼風至북창시유량풍지

 북창으로 때맞춰 서늘한 바람이 다가와

閒寫黃庭一兩章한사황정일량장

 한가로이 황정경한두 장을 베끼네.

 

湘簾(상렴) : 반죽이라는 대껍질로 만든 발이다.(用斑竹編織之簾子)

() : 모시풀, 庭院(정원) : 정원(庭園), 芳草(방초) : 향기로운 풀

() : 1. 작은탁자, 2. 거의, 3. 하마터면

() : 1. 빛나다, 2. 번쩍번쩍하다, 3. 찬란하다.

() : 의 옛 글자

黃庭(황정) :黃庭經도가의 경서로 양생수련(養生修練)의 원리를 담고 있어

          선도(仙道) 수련의 주요 경전으로 여겨진다.

 

뉴욕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소장된 조맹부의 위 시를 쓴 원대(元代) 글씨가 있다.


낙천(樂天) 백거이(白居易772-846)75년을 살며 3,840편의 작품을 남겼다.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긴 백락천의 북창삼우(北窓三友)라는 말이 있다. 북창은 당연히 북으로 낸 창을 말한다. 날이 더우면 북창을 열어 서늘한 바람으로 열기를 식힌다. 그 북창 가에 둔 세 가지 벗은 거문고(), (), ()를 말한다.

    

북창이 들어있는 시는 많다.

  


조맹부(1254-1322)는 원대 화가이자 서예가로 문인화의 대가다.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모두 능했으며, ·북송 시대의 화풍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복고주의적 문인으로 남송화법에서 벗어나 독자적의 화풍인 경지를 열어 문인화의 바탕을 마련했다.

문인화의 전성기라고 부를 만한 원대의 화단을 이끈 사람은 전선(錢選)과 조맹부였다. 전선은 조맹부와는 달리 충절을 지키고 원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한족 문인이었다. 조맹부는 당대의 회화로 돌아가고자 했던 전선의 복고적인 문인화를 더욱 세련되게 가다듬고, 다른 문인들이 쉽게 모방할 수 있는 형태로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문인화의 부흥을 주도했다.

 

조맹부는 절강성에서 송나라 왕족의 후예로 태어났다. 자는 자앙(子昻), 호는 송설(松雪)이다.

송나라의 종실이었으나 원의 조정에 출사하여 죽을 때까지 북쪽 지방에서 벼슬살이를 하며 다섯 황제를 섬겼다. 특히 인종의 총애를 받아 당시 벼슬이 한림학사, 영록대부에까지 이르렀다. 죽은 후에는 위국공에 봉해졌다.

 

그는 글씨를 쓰는 붓과 그림을 그리는 붓은 같은 사용법을 가지고 있다는서화용필동법(書畵用筆同法)’을 주장했다. 서예에 있어서는 당나라 이후의 서예를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조체(趙體), 또는 송설체(松雪體)라는 아름답고 세련된 글씨를 만들어 한국,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조맹부는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나기도 했지만 역대 어느 서예가보다도 많은 노력을 한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매일 새벽에 일어나 몸가짐을 정갈히 하고 글씨를 연습했는데, 날마다 적게는 몇 천 자에서 많게는 몇 만 자를 쓰는 생활을 수십 년간 계속했다고 한다. 또한 많은 고서첩들을 수집하여 이를 전부 모사했다고 하며, 스스로도 평생 15만 장 이상의 천과 종이를 썼다고 말했다.

 

조맹부는 노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인종의 부름을 거부하고,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자신의 출사를 반성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노력과 반성에도 송나라 왕족이면서도 송에 대한 충절을 지키지 않고 원나라의 고위층 관리가 되어 원나라를 섬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원대의 척박한 문화적 환경에서 문인화를 발달시켰으며 꺼져 가던 서예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조맹부의 이 시를 화제로 그린 또 하나의 그림이 있다.

최북보다 다섯 살이 많은 심사정(1707-1769)이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의 원본을 구할 수 없어 다른 블로그의 그림을 취했다.

이 그림이 심사정의 것이라 추정할 이유는 낙관에 있다.

현재(玄齋)는 燦生光을 洗煙光으로 凉風을 淸風으로 바꿨다.


사족으로 위와 같은 의미에서 북창이란 호를 가진 이가 있다.

도학으로 이름이 났고 약에 이치가 밝았던 정렴(鄭磏1506-1549)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