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를 담은 古詩

충주가 망천도 -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허접떼기 2018. 1. 20. 18:31


 

충주의 누정(樓亭) 경영루(慶迎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는데, 예전 이름은 동루(東樓)이다.>

에 편액으로 걸려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를 본다.


                 관아공원내 새로 지은 중원루 / 태조 어진을 반가이 맞이한다는 뜻의 경영루(慶迎樓)가 있던 자리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충주 고지도에서 비정을 해보면



동국여지승람에는 이승소의 시만 적혀 있었다가

신증된 후에는 김종직, 성현, 양희지, 홍귀달이 모두

() () () ()를 음운으로 시를 적었다.

그 중에 충주의 산천을 망천도(輞川圖)에 비한 두 시를 적어보고자 한다.

두 사람은 음운 도()에 왕유의 망천(輞川)을 넣어 지었구나! 한다.


1.

李承召詩

蘂城佳麗古名區 예성가려고명구 當面嵐光入座 당면남광입좌우

風月幾多工部詠 풍월기다공부영 溪山都是輞川 계산도시망천도

侵人爽氣星河近 침인상기성하근 滿地靑陰野鳥 만지청음야조호

盡日登臨無限意 진일등임무한의 斜陽炎炎下平 사양염염하평무

 



한국고전번역원은 아래처럼 해석해 놓았다.

 

예성(蘂城)은 아름다워서 예로부터 이름난 땅, 앞에 다가서는 산 빛이 자리 구석에 들어온다.

바람과 달은 공부(工部 두보(杜甫))의 읊음이 얼마나 많았던가. 시내와 산 모두가 망천(輞川)의 그림일세.

사람을 침범하는 서늘한 기운 은하수가 가까운 듯, 땅에 깔린 푸른 그늘 들새가 운다.

날이 다하도록 올라가 노는 무한한 뜻은, 석양이 점점 푸른 들로 내려오네.

 

8절에서 앞선 4절은 이해가 적절한데 뒷 절은 도무지 해석이 와 닿지 않았다.

 

이승소는 누구일까?

본관은 양성이고 호가 삼탄(三灘)이다.

1422(세종4)에 태어났고1466년 충청감사를 지냈다.

이판, 형판을 거쳐 중추부사를 지내다 1484(성종15)에 졸했다.

 

 

약초꾼이기도 한 두보를 엄무(嚴武)가 현종에게 추천하여

엄무가 죽기 전까지 지낸 벼슬이 정확히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고

宋代 왕수가 펴낸 두보의 시집이 두공부집(杜工部集)으로 보통 두보를 두공부라 일컫는다.


망천도(輞川圖)는 당대 시인 왕유가 송지문이 살던 종남산 망천에 있는 별장을 구해 살았는데

왕유가 망천의 아름다움을 그렸다는 것이 망천도이다.


()는 모퉁이라는 뜻인데그림의 양 면(side)을 의미한다.

침인(侵人)은 사람을 헤친다 인데, 아마도 침입(侵入)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사람을 해친다기보다 밀려 들어온다가 글의 순서상 적절해보이기 때문이다.

상기(爽氣)는 시원한 기운이며 성하(星河)는 은하수다.

만지(滿地)는 온 땅, 땅에 가득으로 해석되고,

청음(靑陰)은 푸른 땅이거나 푸른 그늘로 해석되지만

   만일 淸陰이라고 쓰였다면 소나무 그늘로 풀기도 한다.

진일(盡日)은 하루종일이고

등임(登臨)은 높은 곳(산이나 누각)으로 오르다 또는 올라서 보니로 해석된다.

무한의(無限意)는 무한의 뜻일 수 있다. 그러나 한의(限意)가 없다 로 해석함이 옳은 듯하다.

  한의는 불경에서는 나쁜 생각이고 古詩에서는 제한된, 언짢은 등의 뜻을 가지며 쓰인다.

염염(炎炎)은 불타오른 모습을 나타내는 형용사이고

()는 내려온다는 동사일 것이며 평무(平蕪)는 평평한 초원, 거친 들판이다.

서동형님이 충주를 노래한 시에서 평무를 화무(華蕪)로 읽어 해석한 것은 무리다.


이 시는 우() () () ()를 음운으로 앞 절과 뒷 절이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다.

 

나는 이렇게 해석해본다.

예성은 아름다워 예부터 이름난 고장, 마주한 산 빛이 모퉁이에 자리하며 들어온다.

풍월은 두보의 시에 얼마나 많았던가, 계곡과 산은 모두 망천도다.

시원한 기운이 스며드니 은하수가 가깝고, 온 땅 푸른 그늘에 들새가 운다.

하루 내 올라보니 언짢은 마음 없고, 노을은 활활 타며 평평한 들판으로 내려온다.

 

2.

楊凞止詩

名途十載抱區區 명도십재포구구 駐節中原地一 주절중원지일우

官柳靑連陶令宅 관류청련도령택 村花紅入輞川 촌화홍입망천도

泥深巷口燕爭集 이심항구연쟁집 日暮渡頭人亂 일모도두인란호

歸計未成身又老 귀계미성신우로 故園松菊已荒 고원송국이황무

 



양희지는 1439(세종21) ~ 1504(연산군10) 인데 1498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한국고전번역원은 아래로 해석해 놓았다.

명리(名利) 10년에 구구한 포부, 중원(中原) 땅 한 모퉁이에 목사로 왔네.

관사(官舍) 버들은 푸른데 도령(陶令)의 집에 연했고, 촌락 꽃은 붉어서 망천(輞川) 그림에 들어온다.

진흙이 골목 어귀에 깊었으니 제비가 다투어 모이고, 해가 나루 머리에 저무니 사람들이 어지럽게 부른다.

벼슬 버리고 돌아갈 계책은 이루지 못하고 몸은 또 늙었는데, 고향 동산의 솔과 국화는 이미 거칠어졌으리.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고 무슨 뜻인지 어림할 수는 있다.

 

명도(名途)는 명예로운 벼슬자리라는 고유명사다.

십재(十載)는 십년(十年)이다.

구구(區區)는 구차하다 이다.

주절(駐節)은 벼슬하여 주재하다 이다

도령(陶令)은 도연명을 뜻하고

항구(巷口)는 마을 입구다.

도두(渡頭)는 나룻머리다

고원(故園)은 보통 고향이다.

    

나는 아래로 해석한다.

벼슬길 십년 회포는 구차하다, 중원 땅 한 모퉁이에 (관찰사로) 왔다.

관아버들은 푸르러 도연명 집에 이어지고, 고을 꽃은 붉어 망천도에 들었다.

진흙은 질어 마을 입구에 제비가 다투어 모이고, 날은 저물어 나룻머리에 사람들이 시끄러이 부른다.

돌아갈 계획은 이뤄지지 않고 몸도 늙었다. 고향 솔과 국화는 이미 거칠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