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四天王)은 인도 신화에 나오는 방위신이었으나
불교에서 그 개념을 가져와
불법과 절의 건축물 즉 가람(伽藍)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변하여 사찰의 입구에 자리한다.
보통 왼쪽에 동방과 북방, 오른쪽에 남방과 서방의 천왕을 배치하는데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동방은 지국천왕(持國天王)으로 비파, 창, 보주를 들고
북방은 다문천왕(多聞天王)으로 탑이나 보당을 들고 있다.
남방은 증장천왕(增長天王)으로 칼과 창을 들고 마구니를 밝고,
서방은 광목천왕(廣目天王)으로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다.
동방은 칼, 서방은 창, 남방은 용 북방은 비파라고 설명하는
마곡사나 수타사의 안내문이 자못 의아스럽다.
특히, 동방 지국천왕은 음악을 관장하고 간다르바를 거느려
조선 후기에는 비파를 들고 다소 입을 벌린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야차와 나찰을 부리는 다문천왕이 왜 비파를 들고 있다 하는지 모르겠다.
2023년
구례 화엄사, 여수 흥국사, 보은 법주사, 김천 직지사
고흥 능가사, 영광 불갑사, 홍천 수타사, 공주 마곡사의
사천왕상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2025년 2월 26일
경북 예천읍의 두 보물 석탑을 보러갔다.
모두 탑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된 석탑이 30개
보물로 지정된 석탑은 148개가 있다.
한천 뚝방아래 동본리삼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석탑과 불상이 있으니 예전에 절이 있었음이나
2002년 발굴조사까지도 절의 이름이나 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탑은 높이 4m에 기단의 폭이 1,6m의 크기다. 1965년 7월 16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하부는 남북으로 가로 방향 판돌을 두고 동서로 끼움돌을 깔았고
기단석은 2개의 단으로
아랫단은 높이가 짧고, 작은 경사를 가진 윗돌을 얹은 후
윗 기단은 모퉁이 기둥(우주隅柱)을 두고 면석에 사천왕을 부조하고
상층 갑석에 부연(附椽)이라 불리는 며느리서까래를 얹었는데 신라식의 특징이다
우선 울타리 정문쪽에서 보이는 사천왕상은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으로 보인다.
오른쪽 역시계방향, 뚝방쪽으로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니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으로 보인다.
우측으로 돌면 마모로 잘 분간할 수 없지만 뭔가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방향으로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면 오른손에 뭔 자루모양을 들고 왼손은 잘렸으나 뭔가를 들고 있는 모습의
사천왕상이 있는데 혹 탑을 들고 있는 손이 아니었을까 나름 상상하는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석탑은 탑신이 3개, 3층이고
1층과 2층은 5개의 추녀받침인데 3층은 4개인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지붕돌의 윗면 모퉁이는 살짝 위로 올랐다.
상륜부는 노반과 보주가 있는데 남겨진 것이라기보다 후에 얹은 듯하다.
통일신라 석탑의 정형은 불국사삼층석탑이다.
지붕 밑면 5개 추녀를 가진 옥개석
2단의 기단석과 3층 석탑이 그것이다.
석가탑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탑은 다층화 되고 옥개석은 줄고 탑신의 지붕 모서리가 더 들어 올려진다.
아울러 기단석이나 탑신에 사천왕, 팔부중을 새기는 것은
안녕을 기원하는 아미타여래 숭배가 유행하는 시대의 작품이다.
따라서 이 탑은 통일신라, 남북국시대의 후반기 작품이라 추정된다는 것이다.
탑의 왼쪽 가까운 뒤에 불상이 서있다.
1960년에 무릎아래가 땅에 묻혀있는 상태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머리나 몸 뒤에 원형이나 불꽃모양의 광배(光背)가 없다.
높이 3.46m의 석불로 4등신의 모습이다.
얼굴은 네모지며 수인의 형태로 아미타불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았다는 원효(元曉,617-686)의 영향으로
신라에 두루 유행한 아미타신앙.
원효는 10번만 아미타불을 외우면 극락에 간다고 주장하였다.
아미타불은 범어“아미따유스(amitāyus)”에서 유래하여 한자로 무량수(無量壽)라 표기하고
"아미따바(amitābha)"에서 유래하여 한자로 무량광(無量光)으로도 표기된다.
'끝없는 삶과 빛을 가진 이'라는 뜻이다.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으로 석가이전 10겁 전에 부처가 되었다 한다.
상,중,하품에 상,증,하생의 아홉가지의 손갖춤(수인手印)을 가지는데,
왼손만 가슴의 위치에 있어 하생이며
오른손의 수인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이 닿아 중품으로
설법인(說法印)의 모습을 가져
중생에 법을 설파하는 자세를 표현한 것이다.
겉옷은 통일신라 전통의 우견편단은 아니고 통단(通袒)이고
옷의 주름 형태는
우다나, 우다나야(Udsnaya, BC6세기), 한자표기로 우전왕(優塡王) 양식이다.
주름이 아래 양 다리로 Y자형태로 갈라져 대칭되는 모습을 가진다.
이런 양식의 표현은 8세기 이후에 나타난다.
반면에 아쇼카(Aśoka,BC273-232), 한자표기로 아육왕(阿育王),아수가(阿輸迦) 양식은
주름이 가운데가 내려져 발목까지 이어지는 형태를 가진다.
발 사이와 왼발 위, 왼쪽 귀 아래 콘크리트가 발라졌다.
밟고 선 대좌는 8각으로 연꽃모양의 연화좌로 그 위에 단을 두었다.
안내문은 부드러운 인상이라 적었는데
위로 치켜진 날카로운 눈빛이고
이마의 백호는 있으나 빈 자리며 짧지만 오똑한 코에 두텁지도 얇지도 않은 다소곳한 입술을 가졌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수인의 표현이 이처럼 자세히 남은 석불 입상은 아주 드물다.
시기는 고려로 넘어가기 전의 통일신라 작품으로
지방 호족의 지원으로 세워졌으리라 짐작되고 있다 한다.
탑과 더불어 1965년 7월 16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상도 일원의 석불 중 광배없이 환조로 조각된 보물은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과
거창의 양평리와 상림리에 있는 석조여래입상인데
이들과 비교가 안되는 기교를 갖춘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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