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면서/한국의 석탑

의성빙산사지오층석탑

허접떼기 2025. 3. 20. 18:23

이 탑은 의성 춘산면 산두봉, 북두산, 구무산, 늑두산이 솟아 두른 아래 쌍계천이 굽이치는 계곡

빙산계곡

옆 빙혈의 밑에 자리하고 있다.

빙산사(氷山寺)의 옛이름은  신라 선덕여왕이 비구니들을 위해 창건하였다는 영니사(盈尼寺)였다고 한다.

조선 태종조 전국 88개 자복사찰(資福寺刹¹)중의 하나였으나 임란 시 쫒기던 왜군이 불질러 폐사되었는데 전쟁이 끝나자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1531~1609)의 주도로 1600년 의성읍에 있던 장천서원(長川書院)을 옮겨와 빙계(氷溪)로 개칭하여 자리하고 있다가 1871년 서원철폐로 다시 폐허로 남게 되었다. 한편 철폐된 서원은 2002년 지역 유림의 공의와 2006년 유교문화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자리를 계곡 아래로 옮겨 건립되었다.

1973년 절터를 복원할 때 3층 탑신 옥개석 안의 석함속에 금동사리장치가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갔다. 1층 탑신의 남면에 감실이 있고 금동불좌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나 임란 시 왜군이 훔쳐갔다고 전하며 그 불좌대만 빙혈 입구에 남아 있다.

높이 8.15m.

탑의 형태는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돌을 벽돌 크기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 국보인 의성 탑리 오층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탑은 16장의 돌로 구성한 단층의 기단석 위에 5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렸고, 바닥돌은 16장의 돌로 구성되었고,

그 위에 모퉁이돌(우주隅柱)과 가운데 버팀돌(탱주撑柱)을 두고 넓은 면석을 15개의 돌로 짜맞춰 놓았다.

기단의 위 덮개돌은 8장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그 위에 탑신을 받치기 위해서 비교적 높은 굄돌을 따로 놓았다.

모퉁이기둥돌과 버팀돌에 넓은 면석의 단층 기단

1층 탑신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모습이어서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네 귀퉁이에는 모퉁이돌이 각기 다른 돌로 놓여 있다.

1층 탑신에 비해 위 2~5층의 탑신은 높이가 반 이상 줄어 매우 낮다.

각 층의 지붕돌 역시 각각 크기가 다른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윗면은 5단의 층을 이루고, 밑면은 4단으로 쌓았다.

머리 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윗부분에 덮개돌 모습을 갖춘 노반(露盤)만 남아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정면에 네모진 공간을 마련해 놓았는데

이 공간은 불상 등을 모셔두는 용도로 쓰였다.

높이 1.53m, 너비 1.16m, 깊이 0.56m의 감실(龕室)이다.

감실의 입구에 4장의 돌기둥을 놓아 문설주로 삼았다

 

이 석탑은 의성탑리오층석탑보다는 작고 둔중한 느낌을 주지만, 탑리의 양식을 따르면서 각 부분을 간략화한 석탑으로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후기고려 전기 사이로 추정된다.

 

절터의 북쪽 뒷 기슭에는 예부터 유명한 빙혈이 있는데, 평균 온도가 영하 0.3고 연중 최고온도는 5이하라 한다.

춘원 이광수가 쓴 <원효대사>에 무령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가 지아비인 원효와의 사이에 낳은 설총을 데리고 이곳에 와 원효를 찾았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고 한다.

 

빙혈에 들어가면 검은 돌에 잔뜩 글씨를 조각해 놓았다.

빙혈 왼편 별도의 공간을 두고 입구를 잠금장치로 닫아 놓은 곳에 서자 정말 차가운 바람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1) 태종(재위 1400~1418) 때 억불정책으로 궁중에서 행해지던 모든 불사를 폐지시키고 14063월 전국 사찰들의 토지와 노비,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통폐합해서 12개 종파의 242개 사찰만을 국가 공인 사찰로 인정했다. 140712월에는 자복사(資福寺)란 이름의 7개 종파 88개 사찰을 지정해 지난해 엄청난 수의 사찰들을 없앤 데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242개 사찰에서 제외된 사찰중에서 골라 종파별, 지역별로 안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