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면서/한국의 석탑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허접떼기 2025. 4. 7. 09:17

경북 의성에 국보와 탑을 돌아보고 한 달이 지나

탑리리오층석탑에 대한 글을 올리는 심정은 지난 산불로 인해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에 있는 통일신라 5층석탑.

높이 960. 기단 너비 450cm국보(1962.12.20 지정).

탑의 각 부분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1층탑신에서 목조건물 양식까지 보이는 모전석탑이다.

기단(基壇)은 분황사탑처럼 낮은 단층으로

14석으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24석으로 면석(面石)을 구성하였고

중간 부분에 우주(隅柱모퉁이돌)

2개의 탱주(撑柱버팀돌)를 별석으로 결구함이 특징으로,

우주는 신라의 석탑에서 드문,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배흘림 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익산미륵사지석탑·부여정림사지5층석탑과 같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갑석(甲石)8석으로 덮었고

그 위에 다시 탑신을 받치기 위한 괴임돌이 놓여있다

 

첫 번째 층 탑신은 우주를 별석으로 세우고

남면에는 감실(龕室)을 개설했으나 문비는 없고 문 주위에 2줄의 선을 양각했다.

주두(柱頭기둥머리)에는 큰 규모의 목조 건물에서,

기둥 위 지붕을 받치며 차례로 짜 올린 좌두(坐枓)를 얹고

벽 위로는 액방(額枋창이나 문틀 위벽의 하중을 받치는 인방(引枋)

형방(桁枋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도리)을 이중으로 얹어

배흘림과 마찬가지로 목조건축 양식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에는 각면 가운데에 탱주 하나씩을 모각하고 있다.

옥개석(屋蓋石)면과 받침부는 별개로 구성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각층 6단씩 층단을 이루고 받침수는 5단이며 추녀는 모서리가 약간 위로 향하는 전탑형식의 모습이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다.

이 탑은 모전석탑으로 전탑을 모방한 형태이지만

1층 탑신의 우주와 탱주의 배흘림 모양,

주두 위의 좌두,

추녀의 반전 등은 백제계 석탑에 많이 나타나는 목조건축 양식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 탑으로 석탑이전 전탑과 목탑이 있었음을 증거하여, 모전석탑 중 가장 오래된 형태를 갖췄다.

탑이 바라보이는 오른편에 2016년에 5년에 걸친 보수과정에서 바꿔진 부재를 따로 전시해 놓았다.

조국이 광복된 이후 기단의 재질을 화강암으로 사용하였으나

2016년 마무리된 보수에는 응회암으로 기단의 일부를 교체하였고

훼손이 심한 4층과 5층을 집중적으로 해체 보수했다.

지금은 일련번호를 쓰지 않기로 하였으나 국보 77호로 지정되었었다.

 

탑 북면에 대정15년 중수(重修)를 기념한 석탑보존회 명단이 새겨져 있다.

대정(大正) 15년이면 1926년이고 새겨진 인물의 면면을 나름 찾아본 결과를 적어본다.

아리무라 마사히로(有村正浩)는 당시의 산운보통학교 교장

이홍(李鴻,1887-1972)은 군참사郡參事를 지낸 영천이씨다. 당시 귀천(歸川)금융조합에 근무하였다.

지금의 봉강재鳳岡齋와 수락당壽樂堂 현판 글씨를 썼고 용문정龍門亭을 개축한 이다.
신기섭(申基燮) 1902년 토지조사를 한 지계아문 경북지계(地契)위원을 지낸 이다. 산운면 청로리에 살았다.

이장억(李章億) 당시 조문면 대리동 지주로 주류제조나 연초경작 면허가 있었다

이태철(李泰喆) 가음면 현리 사람으로 1929년 의성군 산운면장이었다.

박상순(朴尙淳) 운천면 만천동 사람으로 탁주제조 면허를 가졌다.

김순지(金順芝) 로 읽었으며 경력을 찾을 수 없었다.

하기시마 교요(荻島敎雄)는 당시의 산운주재소장이었다.

하기시마 교요는  微光미광이란 향토사잡지를 발행하여 조문국을 연구했다.

금성 대리리에 위치하 조문국사적지

조선총독부가 1394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발표하여 보물지정목록을 정하였는데

1926년 방치된 돌탑을 중수함에 아리무라 마사히로有村正浩앞장을 섰다는 것이다.

아리무라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검색하면 가고시마사람으로 당시 31살의 산운보통학교장이였음을 알 수 있다.

두 일본인과 6명의 당시 조선인이 어떻게 중수하였는지는 모르나 문화재에 돌을 새겨 그 이름을 오래도록 후대에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 새겼던 것인지 간에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굳이 남기려면 사진을 박아 놓던지 기록으로 남기면 그만일 일이었지 않을까?

자료를 찾아본 나 자신도 뿌듯함이란 없었는데 조선일보 기자 박종인이란 자가 2017년 의성 조문국의 비밀과 시인 오효원이란 기사에 방치된 돌탑의 의미를 읽고 중수한 일본인의 혜안과 노력에 고마워해야 한다고 썼다. 박근혜가 탄핵으로 파면되고 한 달이 안되서다. 고마운 일인가?

 

금성면의 장날은 1일과 6일이다.

36일 이곳을 찾은 날도 당연히 장날이었다. 그러나 점심 무렵임에도 장은 시들해 보였다.

지방감소의 영향이다. 의성군도 점점 인구가 줄어 5만이 안 되고 금성면의 인구는 4천명을 겨우 넘긴 상태며  하향곡선을 그리는 추이다.

관덕리와 빙산사지 탑을 보고나서 이 탑을 둘러보기 전 시장 옆에 있는 유명한 논산칼국수를 찾았다.

홀은 브레이크 타임이 다가와선지? 손님이 한 분만 계셨다.

비빔밥과 칼국수가 7,500원이다.

당연 칼국수를 시켜 먹었다.

면발의 검은 점같은 것이 서리태라고 사장님이 일러주셨다.

뽕잎가루도 들어간다고 하는데 정말 맛있는 집이다.

테이블 번호를 화투장으로 하셨다.

왜 논산인지 궁금하였으나 묻지는 않았다. 동네한바퀴에도 나왔다 한다. 생에 손가락으로 꼽을 칼국수 맛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