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신위의 묵죽 속의 글 1

허접떼기 2019. 3. 10. 18:11

신위(申緯,1769-1845)는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 경수당(警修堂)이다.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신대승(申大升)이며, 어머니는 정언 이영록(李永祿)의 딸이다.

1799(31)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12(44) 진주겸주청사(陳奏兼奏請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갔는데,

이때 청의 학자와 문인들과 만나 자신의 안목을 넓혀갈 수 있었다.

특히 당대의 대학자인 옹방강(翁方綱)과의 교유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10년 북경에 먼저 들렀던 추사 김정희가 만나보라고 권했다.

귀국 후 신위는 전에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워버렸다고 한다.

 

병조참지를 거쳐, 1815년 곡산부사로 재직시 전염병으로 고을이 피폐해져

세금과 정역 탕감을 조정에 탄원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고

1818년 춘천부사 때 지방 토호들의 횡포에 맞서다 파직되기도 하였다.

 

1822(54)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당쟁으로 파직되었다, 곧 복관되어

1828(60)에는 강화유수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830(62) 윤상도(尹尙度)의 탄핵으로 또다시 물러나 고향 자하산에서 은거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복직과 파직을 거듭하였고, 헌종대에 이조참판,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1830년 윤상도의 탄핵은 김정희와 얽혀 있어 주목된다.

윤상도가 신위와 호판 박종훈, 어영대장 유상량을 탐관오리라 탄핵하였는데,

신위에 대해서는 춘천부사시절 여색을 탐하여 백성의 원망이 많고

강화유수가 되어도 백성의 재물을 긁어 들이고 여색을 탐해 딸 가진 자가 도망한다고 흉을 보았다.

창기를 끼고 동류를 모아 해지도록 음탕하게 놀았다고 순조에게 이른 것인데

순조는 즉시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지휘하고 시키는 자가 있을 것이나

우선 가벼이 윤상도를 추자도로 유배 보냈다.

그 뒤에도 사간원에서 윤상도의 배후를 국문하자는 건의가 이어지고

10년 뒤 1840(72) 대사헌 김홍근이 이를 들추어 윤상도를 한양으로 불러 재심하였다.

1830년 사건 담당 김양순의 진술에 '윤상도의 상소문을 김정희가 모략하였다'하여

엄청난 국문이 벌어져 김양순이 죽고 윤상도 부자가 사형되었고

김정희는 당시 우의정 조인영의 도움으로 제주로 유배가게 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여부를 떠나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실력 싸움이고

시파의 맹주 김조순 집안의 세도정치 형성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추사는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후계인 노론 벽파이며 경주김씨로

시파인 안동김씨 가문에게는 어떻게든 멸하고 싶은 정적이며

신위는 윤상도의 시각으로는 잘나가는 집안 출신으로 술과 여자를 가까이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하의 후학으로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을 펴낸 김택영(金澤榮,1850-1927)

자하가 호탕하고 음악과 여색을 즐기고 스스로에 퍽 자부심이 있었으며 세상물정을 놓쳤다고 적었다.

어쨋든 글씨는 이미 14살에 정조도 재주를 인정했으며

천부적인 재주로 는 조선에 필적할 이가 없었고

그림은 원대의 예찬(倪瓚)이나 심주(沈周)가 아니면 상대할 사람이 없다는

손팔주 교수의 자하연구 기록이 있다.

타고난 유전자로 넉넉했으며 건강해 칠순이 넘어도 세밀한 필법으로 나비를 그렸고

그의 아들들도 그림에 능했다.


자하가 72세가 되는 1840

신위는 고향에서 예술 활동을 하였고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로 향했다.

그림에 적은 글은 이렇다.



石吾甚愛之(석오심애지) ! 내가 매우 사랑한다.

莫遣牛礪角(막견우려각) 소를 끌고 와 뿔을 갈지 마라

牛礪角尙可(우려각상가) 소가 뿔을 가는 것이 오히려 낫다.

牛鬪殘我竹(우투잔아죽) 소가 싸우면 내 대나무가 죽을 것이니.

 

() : 숫돌에 갈다. 숫돌

() : 해치다. 죽이다.

   

이 글은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1045-1105)의 시다.

황정견의 자는 노직(魯直)이고 호가 산곡(山谷)이다.

소식(蘇軾)의 제자로 함께 소황(蘇黄)이라 불리며 초서를 잘 써 북송대 4대 명필로 일컬어진다.


이백(李白,701-762)이 악부(樂府)

홀로 물속 진흙을 거르니, 물이 깊어 달을 못 보네.
달을 보지 않아도 괜찮지만, 물이 깊어 행인이 빠지겠네.’

라고 하였다.

獨漉水中泥(독록수중니) 水深不見月(수심불견월)

不見月尚可(불견월상가) 水深行人沒(수심행인몰)

 

山谷 황정견이 이것을 본받아 지은 것이다.

이태백은 사람을 아끼고 산곡은 돌과 대나무를 아낀 것이니 비교된다.

 

다른 대나무 그림을 본다.


이 그림에 쓴 자하의 글씨는

老霞 爲彛亝先生寫 (노하 위이재선생사)

 

늙은 자하가 이재선생을 위해 그림.

 

()는 늙은이, 특별히 나이 70세를 말하기도 한다.

彛亝(이재)彛齋, 의 옛 글자다.

이재를 호로 가진 사람은 셋이 있다.

1. 고려의 백이정(白頤正)

2. 조선의 권돈인(權敦仁, 1783-1859)

3. 김후신(金厚臣 ,1753? - ?)이 그들이다.


김후신은 아버지 김희겸을 이어 도화서 화원이었다.

이 그림을 자하가 70대 노구에 그렸으면 1838년 이후다.

김후신이 생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권돈인은 추사와 둘도 없는 친구사이다.

1838년 권돈인은 경상감사를 거쳐

1839년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1840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냈다.

 

따라서 그림의 이재는 권돈인일 것이다.

낙향하여 은거하던 자하가 이재 권돈인을 위하여 대나무를 그린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