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김득신의 풍죽도와 묵매도의 글

허접떼기 2019. 3. 3. 13:18


긍재 김득신풍죽도(風竹圖)그림에 적혀있는 글은 이렇다.


長聽南園風雨夜(장청남원풍우야

恐生鱗甲盡爲龍(공생인갑진위룡

남원의 비바람이 길게 들리는 밤

비늘껍질이 나서 용이 될까 두렵네.

 

이 글은 당대(唐代) 진도(陳陶)죽십일수(竹十一首)중 제4수의 뒤 두 절이다.

진도가 대나무에 대해 쓴 이 시의 원문은 이렇다

 

青嵐帚亞思君祖(청람추아사군조)

綠潤偏多憶蔡邕(녹윤편다억채옹)

長聽南園風雨夜(장청남원풍우야)

恐生鱗甲盡爲龍(공생인갑진위룡)

 

대 숲의 안개가 추함을 쓸어 군조(君祖)가 생각나고

푸른 윤기가 뜻밖에 많아 채옹(蔡邕)이 기억나네.

남원의 비바람이 길게 들리는 밤

비늘껍질이 나서 용이 될까 두렵네.  


양승암집(楊升庵集)10, 書蕉(서초)에 진도의 시를 적고 주()를 달았는데


陳張君祖竹賦: (青嵐運帚碧空掃煙) 蔡邕竹贊:(綠潤碧鮮紺文紫錢)...

진장군조의 죽부에 '초여름 대나무 숲의 안개가 빗자루를 옮기듯

파란 하늘의 연기를 쓸고의 내용과

채옹의 죽찬에 이르길 푸른 윤기가 파랗고 맑아 감빛 문양이요

자줏빛 술잔 같구나.’의 구절을 진도가 인용하였다. 라고 쓰여 있다.

 

성희명법서고(盛熙明 法書考)

() 목제(穆帝, 343-361) 시기,

장익(張翼)의 호가 君祖라 하고 글씨를 품한 글이 있다.

찾아 본 사료 중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다.

전당시(全唐詩) 745권에 진도의 삶이 적혀있고,

746권에 이 시가 실려 있는데

君祖吾祖로 적혀있다. 다른 책에서는 偏多高枝로 적혀 있다.


靑嵐(청람) : 대나무 숲 사이의 안개,

() : 빗자루. 쓸다

() : 추하다(), 다음(), 적다(), 동서(), 미워하다(), 물가()

蔡邕(채옹) : 132~192, 후한의 서예가로 비백체(飛白體), 혁필화(革筆畵)의 창시자

南園(남원) : 남쪽에 있는 동산.

鱗甲(인갑) : 1. 비늘과 껍데기 2. 악어, 거북의 비늘 모양의 딱딱한 껍데기


진도(陳陶)의 자는 숭백(嵩伯)이고 호가 삼교포의(三教布衣).

생몰년대와 생애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武宗 연간(840-846)에 활동하였다.

여러 번 진사시에 응했으나 낙방하여 은거하고 벼슬 없이 살았다.

그런 이유로 스스로 벼슬 없는 이를 가리키는 포의라 하였고,

會昌의 폐불이라 하여 도교에 빠져 불교 등을 탄압한 무종의 시기에 살았는데,

진도가 당시 불교의 가르침을 세 가지로 나눈 용어 삼교를 호로 썼는지 궁금할 뿐이다.


  

긍재가 그린 묵매도(墨梅圖). 그림의 글은

육유가 쓴 시 사적산관매(射的山觀梅)에 나온다.

 

凌厲冰霜節愈堅 人間乃有此臞仙능려빙상절유견 인간내유차구선
坐收國士無雙價 獨立東皇太一前좌수국사무쌍개 독립동황태일전
此去幽尋應盡日 向來别恨動經年차거유심응진일 향래별한동경년
花中竟是誰流輩 欲許芳蘭恐未然화중경시수류배 욕허방란공미연

 

심한 얼음서리에도 절개는 점점 굳어져, 인간은 이에 이 여윈 신선을 뒀구나.

앉아서 국사를 얻으니 둘도 없이 커, 태일성 앞에 홀로선 동황이로다

멀리 찾아다닌 지 하루 종일이다. 저번 때 이별의 한이 해가 지나도록 느껴지네.

꽃 중에 이 정도는 누가 또래일까? 허락하면 난초가 그렇지 않을까 두렵네.


凌厲(능려) : 뛰어나게 훌륭함, 힘차게 앞으로 나아감. 용감히 분기함.

臞仙(구선) : 여윈 신선

國士(국사) : 온 나라에 재주가 특히 뛰어난 선비

() : 크다 (= )

東皇(동황) : 봄을 맡은 신(), 청황(靑皇)

太一(태일) : 천지 만물의 근원, 태일성(太一星)

向來(향래) : 요전의 그때, 저번 때

經年(경년) : 해를 보냄, 해가 지나감

流輩(유배) : 같은 또래

 

육유(陸游/1125-1210)는 자가 무관(務觀)이고 호는 방옹(放翁)으로

만(萬) 수()가 넘는 시를 남긴 중국 역사상 최다작가다.

왕안석(王安石,1021-1086) 소식(蘇軾,1036-1101) 황정견(黃庭堅,1045-1105)과 함께

송대(宋代) 4대시인이며

양만리(楊萬里,1127-1206) 범성대(范成大,1126-1193) 우무(尤袤,1127?-1194,1202)와 함께

남송 4대 시인으로도 불린다.

여진족의 왕조 금(,1115-1234)에 대해 극렬한 항전주의자여서 악비의 독살을 애통해하고,

고종 때 재상 화친주의자 진회(秦桧)에 의해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하고도 축출되었다.

효종 때 진사에 급제 후 진강(鎭江)의 통판으로 임명되어

()을 치고 옛 영토를 회복하자는 주전론(主戰論)을 내세웠다.

그러나 주화파의 득세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재미난 일화도 있으니

당완(唐琬)과의 절절한 사랑과 재회하여 심원(沁園)의 벽에 썼다는 채두봉(釵頭鳳)이다.


이 두 그림은 115.6 X 49.6의 같은 크기를 가져 대련으로 그렸을 것이라 추정된다.

긍재가 사군자 중 대나무와 매화를 그리고 관련한 주제의 글을 적어

찾아보며 공부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