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1754~1822)이 그린
이 그림을 유압(遊鴨), 야압(野鴨), 정하지 않고 둘 다 부른다.
그림을 보면 오리가 놀고 있고, 화제(畫題)에는 野鴨이라 적혀 그러는 가보다.
이 그림에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가 글을 적었다.
畵裏瀟湘自要秋(화리소상자요추)
詩家野鴨漫多愁(시가야압만다수)
試看翠減紅消處(시간취감홍소처)
好趂江清月冷舟(호진강청월랭주)
그림 속은 소상이니 절로 가을을 기다리고
시인에게 들오리는 너무도 많은 시름이었네
푸름이 줄고 붉음이 사라지는 곳을 보려
곧잘 강은 맑고 달이 찬 곳을 쫓아 배를 타네.
瀟湘(소상) : 중국 호남성 소수(瀟水)가 상강(湘江)에 합류되는 곳 自要(자요) : 중국어로 ...만 하면 이다, 要(요)는 요약하다, 원하다, 적중하다, 이루다, 기다리다... 詩家(시가) : 시인(詩人) 試看(시간) : 중국어로 시험해보다, ...해 보면 好(호) : 좋다, 좋아하다, 곧잘, 걸핏하면 趂(진) : 趁과 같은 글자. 쫓다, 따르다. |
신위는 진정한 조선후기 시, 서, 화 삼절(三絶)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경수당(警修堂)으로
대사헌 신대승(申大升)이 부친이다.
1799년 정조 어전에서 치른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 당하관 중 제술과 강독으로 뽑힌 문신)에 발탁되었다.
1812년(순조 12) 진주겸주청사(陳奏兼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
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의 교유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14년에 병조참지를 거쳐, 이듬해 곡산부사로 나갔고,
1816년 승지를 거쳐, 1818년에 춘천부사로 나갔다.
그러나 지방 토호들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맞서다 파직 당하였다.
1822년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당쟁의 여파로 다시 파직된 뒤, 곧 복관되어
1828년에는 강화유수로 부임하였으나,
윤상도(尹尙度)의 탄핵으로 물러나 시흥 자하산에서 은거하였다.
1832년 다시 도승지에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였고,
다음 해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경기암행어사 이시원(李是遠)이 강화유수 때의 실정을 거론하여
상소하다가 평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이조참판·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신위는 글씨·그림 및 시에 많은 업적을 남겼고,
시에 있어 한국적인 특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며
특히 없어져가는 악부(樂府)의 보존에 힘을 기울였다.
김택영(金澤榮)은 시에 관한 한 500년 이래의 대가라고 칭송하였다.
또한 그림에 있어서는 산수화와 함께 묵죽에 능하여,
이정(李霆)·유덕장(柳德章)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힌다.
강세황(姜世晃)에게서 묵죽을 배우고 남종화(南宗畫)의 기법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 남종화의 꽃을 피워
그의 묵죽화풍은 아들 신명준(申命準), 신명연(申命衍)은 물론
조희룡(趙熙龍) 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에 이 서체가 유행하는 데 계도적 구실을 하였다.
그림에 평론하는 분들은 이 그림의 수기법(나무를 그리는 방식)이 김홍도를 닮았다고 한다.
암석의 주름과 수면에 평행한 나무의 필선(筆線)이 자유롭고 들오리의 배치가 안정감이 있는 구도라 한다.
내가 보기에 단연 자하가 적은 시가 긍재의 풍속적인 그림을 돋보이게 한다.
다음에 신위의 묵죽에 대해 기회를 가져 올려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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