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작가 미상의 어초문답도

허접떼기 2019. 2. 19. 17:49


이 그림은 그린 이가 누구인지 모른다. 

이 그림은 임금이 어떤 주제를 던지고 그 질문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조선 숙종은 1661년에 태어나 1674년 즉위 해 46년간 재위하고 60의 나이인 1720년 죽었다.

세 차례 환국(換局)이 그의 재위 동안 일어났다.

그 중 장희빈의 등장으로 송시열을 관직 삭탈하고 쫓은 후 사약을 내리고

남인을 회복시켰으며, 율곡과 성혼을 문묘에서 축출한 기사년 환국과

영조의 모친 숙원 최씨를 총애하면서 인현왕후 민씨를 복원하고 장희빈을 사사한 갑술환국 등

실로 엎치락뒤치락 다사다난 했던 시절의 왕이다.

 

그러한 숙종이 던진 화두가 어초문답에 대한 이득과 손해였다.

 

兩個有人長與李(양개유인장여이) 두 사람이 있다 장씨와 이씨

腰間一斧手中鯉(요간일부수중리) 한 사람 허리에 도끼 하나, 한 사람 손에는 잉어

酒酣何事來河邊(주감하사래하변) 술에 취해 무슨 일로 강가에 왔나?

應語樵漁害利耳(응어초어해리이) 어부와 나무꾼이 서로 주고받는 말이 손해더냐 이득이더냐?

歲在乙未仲秋下浣題(세재을미중추하완제)

때는 1715(을미년) 음력 8월 하순에 쓴다.

 

흔히 중국인의 姓別 인구를 얘기할 때 장삼이사(張三李四)라 한다.

인구의 7할이 장씨 아니면 이씨라는 거다.

그 흔하고 평범한 두 사람 중 하나는 고기 잡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가 나무꾼이라는 것이다.

宋代 두 문호 강절(康節) 소옹(邵雍/1011-1077)과 동파(東坡) 소식(蘇軾/1036-1101)의 작품에

어초(漁樵) 간의 문답(問答)이 실려 있고

그 이후로 도가적 은일사상과 관련되어 이어져 왔다.


특히 숙종 연간(1674-1720)부터 어초문답도가 나타나는데

당시 조선 서인(西人) 세력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가 있다.


소강절과 소동파는 자신들의 글에 이른바 소요유(逍遙遊)의 삶을 빗댄 어초문답(漁樵問答)을 썼고,

조선 숙종 무렵의 그림이 여럿 있다.

모두 숙종의 어제(御題)가 있어 유행처럼 그려진 것이라 추측된다.

<홍득구(洪得龜/1653-1724)>의 어초문답(漁樵問答)>

어부는 맨발이고 왼손에 붕어인지 잉어인지 두마리를 줄에 꿰어 들고 오른 손은 대나무 낚싯대를 들었다.

나무꾼은 오른 손에 봇짐용 나무를 들고 허리춤에 손도끼를 차고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와 똑 같은 구도로 숙종대 도화서 화원인 이명욱(李明郁)이 그린 그림도 있다(아래)


그리고 시냇가 나무 아래 마주 앉아 있는 나무꾼과 어부를 그린 그림이 있다.

<정선(鄭敾/1676-1759)의 어초문답(漁樵問答)>


소강절의 <황극경세서>내 <어초문대(漁樵問對)>의 내용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은

이인상이 부채에 그린 <어초문답도>라고 생각한다.

이수(伊水)강 위에 떠 있는 배안에 있는 어부와 강가 너럭바위에 앉아 있는 나무꾼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어초문대>의 시작은 이렇다.


어부가 이수(낙양 아래 흐르는 강)위에 낚싯대를 드리우는데

나무꾼이 그곳을 지나다 짐을 풀고 어깨를 쉬려 널쩍바위에 앉아 어부에게 묻기를......


 漁者垂釣于伊水之上樵者過之弛擔息肩坐于磐石之上而問於漁者,......

 어자수조우이수지상초자과지이담식견좌우반석지상이문어어자,......


이 글은 다음에 해하여 올려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