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오찬(吳瓚)의 산수도(山水圖)에 적힌 글

허접떼기 2019. 2. 14. 21:23

 <오찬(吳瓚)의 산수도(山水圖)>



오찬이 그렸다는 이 그림에 가 세 개가 있다.

그 중 오른쪽의 두 글만 본다.

 

淸修僑舍爲元博寫 胤之(청수교사위원박사 윤지)

오찬이 김무택을 위하여 그렸다. 이윤영


淸修已徃古人(청수이왕고인)

청수(오찬)은 이미 죽어 고인이다.

僑舍此會石可復得(교사차회석가부득)

교사(오찬)은 이 모임에서 다시 수석이 떠올랐지

元博宜寶惜此幅(원박의보석차폭)

김무택은 마땅히 이 폭을 아껴야한다.

且僚胤之續筆(차료윤지속필)

동료 이윤영에 이어 붓을 놀렸다.

元靈題(원령제) 이인상이 쓰다.

 

1. 淸修僑舍(청수교사) : 오찬(吳瓚/1717~1751)

2. 元博(원박) : 김무택(金武澤1715-1778)

3. 胤之(윤지) : 이윤영(李胤永1714-1759)

4. 元靈(원령) : 이인상(李麟祥1710-1760)

이 분들 이른바 단호그룹(단릉 이윤영, 능호관 이인상)으로 불리는

그야말로 가깝고도 가까운 친구들이다.

 

왼쪽의 글은 그림에 묻혀 정확히 읽고 해석하기에 무리다.

 

오찬은 본관이 해주(海州)이고,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청수재(淸修齋),

황경원의 절친이던 오원(吳瑗)의 이복아우이다.

1751년 별시 장원급제하고 정언(正言)에 제수된 후

징토를 엄히 할 것과 시비를 분명히 할 것 등을 상서(上書)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이어서 사직(司直) 이종성(李宗城)이 흉역(凶逆)들과 어울린다는 상서를 계속 올리고

내수사(內需司: 왕실 재정 관리부서)를 파할 것을 청함으로써

급기야 사판(仕版:관리 명부)에서 삭제되고 성문 밖으로 쫓겨났다.

후에 함경도 삼수(三水)로 귀양 보내져, 그곳에서 죽었다.

 

김무택沙溪 김장생의 후손이다.

字는 元博(원박)이다. 

5세에 모친상으로 숙부인 퇴어(退漁) 김진상(金鎭商/1684-1755)을 따라 서울에 살았다.

퇴어는 과격한 노론이었다. 신임년 옥사로 유배당했지만

영조 즉위로 이조정랑을 시작으로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1753년 좌참찬에 이르렀다.

그 덕에

김무택은 1768년 선공감(繕工監 : 토목,영선을 관장) 감역(監役: 9)을 거쳐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6)가 되었다 파직되고

사옹원(司饔院) 주부(主簿)를 거쳐 한성부(漢城府) 판관(判官,5)을 맡아보다

1778년 각혈병으로 죽었다.

 

찬이 상서(上書)한 내용은 국계(國系)에 관한 무함(誣陷)부터 거론되었다.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에 대한 무함을 가리킨다.

즉 영조가 경종을 시해하였으며,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실록 영조 27(1751) 518일 기사에 정언 오찬의 상서(上書)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은 1721(辛丑年)~1722(壬寅年)의 일(辛壬士禍)

1728(戊申年)의 무신난(이인좌의 난)을 거론하며

영조를 무함한 소론과 남인에 대한 징토를 엄히 하고 시비를 분명히 할 것을 청한 것이다.

신임사화는 목호룡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역모를 고변함으로써

노론 4대신이 사형에 처해지고 60여 명이 처벌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 측의 상소로 무고임이 밝혀졌는데,

김일경이 끝까지 공모자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목호룡과 김일경 두 사람만이 처형되었고 그가 밀고한 글은 불태워졌다.

무신난은 1728년(영조 4),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 계열의 사람들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는데

그 명분으로 경종이 영조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의혹과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웠다.


오찬의 상서에 대해 장헌세자가 대리청정하고 있었기에 답하기를,

나는 그저 성상의 뜻을 따를 뿐이다,

  하물며 대조께서 몇 년 동안 고심하신 것을

  지금 어찌 이와 같이 내게 번거롭게 하느냐? 한심스럽다.”라고 하였다.

("余則但當遵奉聖意 況大朝之幾年苦心, 今何可如是煩擾於余乎? 試涉寒心")

 - 성상과 대조는 영조를 일컬음

 

오찬은 물론 이인상과 이윤영, 송문흠, 황경원, 신소 이 분들은

명이 망한 지 백년이 지나도록 배청사상에 가득 찬 노론 계열이다.

당시 영조는 물론 1749년부터 대리청정 하던 장헌세자(사도세자)

사대부의 의리와 절개를 중시하는 청류(淸流)에 호응, 노론과 갈등이 심했다.

계비 김씨(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은 세자에게 계속 무고를 했고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金漢耈1723-1769)와 윤급(尹汲)등은 세자의 폐위를 꾀했다.

이에 장헌세자가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악질에 걸려 고생했다.

김한구 등에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

세자의 비행 10여 조를 적어 상소를 올리자 영조가 대노하여

나경언(羅景彦)을 사형에 처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고

세자가 이를 듣지 않자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굶어 죽은 것이다.

그 뒤 시파, 벽파의 대립이 발생하여 당쟁은 새롭게 변화되었다.

 

위창 오세창의 근역서화장(槿域書畫徵)에 오찬이 쓴 자필시가 있다.

瀟灑東溪築 淸泠一壑 (소쇄동계축 청령일학전)

맑고 깨끗한 동쪽 개울을 막아 욕심 없이 논 한 뙈기 갖는다.

田園堪自力 琴鶴期餘 (전원감자력 금학기여년)

전원은 제 힘으로 견디니, 거문고와 학은 남은 삶에 기약하네.

野意蔬筍澹 幽愁水石 (야의소순담 유수수석전)

나물과 죽순을 먹는 시골의 뜻은 담백하고, 깊은 시름은 수석에 얽혔구나.

朋罇久阻濶 待向峽江 (붕준구조활 대향협강전)

친구와 술자리도 오래 막히고 어긋나 협강을 향한 역에서 기다린다.

 

敬父 경부

 

사족으로 덧붙여 적는다.

가끔 옛 그림을 소장한 측에서 그림에 대한 해석이야 주관적이니 그렇다 하지만

제시(題詩)나 관지(款識)를 오독하여 엉뚱한 해석을 놓는 경우를 발견한다.

게다가 다른 이의 작품을 소개하는 국립박물관의 분류 착오도 발견된다.

불과 150년 전의 조선의 흔적은 한자를 알지 못하면 보는 즉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에 나 자신도 해독에 대해 잘못을 깨달으면 스스로 질정을 기꺼이 할 것이며,

혹 읽어보시는 분들의 지적을 고맙게 받으려 한다

이러저러해도

세종과 집현전의 한글창제라는 현의(玄義)를 묻어 버린

사대와 현학에 빠진 지배층에 대한 씁쓸함은 어쩔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