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전기의 매화서옥도 그림과 글씨

허접떼기 2019. 1. 26. 00:22

전기(田琦1825(순조 25)1854(철종 5))본관은 개성(開城)이고

자는 이견(而見) 위공(瑋公) 기옥(奇玉), 호는 고람(古藍) 두당(杜堂)이

약포(藥鋪)를 운영한 중인으로 오경석(吳慶錫)과 함께 이상적(李尙迪)의 문하에서 김정희를 알게 되어

1849(헌종15) 유재소(劉在韶유숙(劉淑김수철(金秀哲허련(許鍊조중묵(趙重默) 등과 함께

김정희의 화평을 통해 그림지도를 받았는데

이때 김정희는 그의 추산심처도<秋山深處圖에 대해

"쓸쓸하고 간담(簡淡)하여 자못 원나라 사람의 풍치를 갖추었으나 요즘에는 갈필(渴筆)을 써

석도(石濤)나 운수평(惲壽平) 등의 제가와 같음이 없다"라고 했고 

강간추사도<江干秋思圖에 대해서는

"채색과 선염은 법도가 없어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기(習氣)를 꽤 범하고는 있으나

필의는 옛날의 규범을 잃지 않았다"라고 평했다.

 

1847년경부터 '벽오사'(碧梧社)의 동인으로 조희룡(趙熙龍) 나기(羅岐) 유학영(柳學永)등과 교유했고

특히 유재소(劉在韶 18291911)와는 특별히 가깝게 지냈다.

조희룡은 호산외사(壺山外史)에서

"체구가 크고 준수하고 인품이 그윽해 진(()그림에 나오는 인물의 모습과 같다"라 하고

전기의 산수화에 대해

"쓸쓸하면서도 조용하고 간담하면서 담백하여 원대의 회화를 배우지 않고도

원나라 사람의 신묘한 경지에 도달했다"라고 했다. 더 나아가 그의 시화(詩畵)

당대에 비교할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상하 100년을 두고 논할 만하다고까지 했다.

 

김정희파의 서화가 중에서도 사의적(寫意的 : 사물의 형태보다는 내용이나 정신에 치중하는 것)

문인화의 경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구사했던 인물로 크게 촉망받았으나

3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유재소(劉在韶 18291911)

본관이 강릉이고 자는 구여(九如) 호는 학석(鶴石), 형당(蘅堂), 소천(小泉)이다.

20대에 흥선대원군 집안에서 겸인(傔人)으로 있었다. 이후 사복시 판관을 지내기도 했다.

 

김정희는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서 소천의 그림에 대하여

원나라 사람(元人)의 필의(筆意)있으나 간고정엄(簡古精嚴)할 곳에 힘을 주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이는 기법(奇法)을 먼저하고 정격(正格)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라고 낮추어 평하였다.


간송미술관에 있는 이 그림이 전기가 유재소를 위하여 그렸다는 '매화서옥도'다.


오른쪽 위에 당대의 괴짜이며 풍류를 즐기던 천재 하원(夏園) 정지윤이 畵를 썼다.

回徑小橋遮不分(회경소교차불분돌아가는 길 작은 다리는 가려서 분간이 안 되고

千香万影竟披紛(천향만영경피분온갖 향과 그림자가 끝을 내니 흩어져 어지럽다

種梅不傳多如許(종매부전다여허매화 심기가 전하지 않음이 많으니 이와 같아서라

只道澷山是白雲(지도만산시백운단지 온 산이 흰 구름으로 덮였구나! 여기리.

  右仰倩古藍作梅花書屋圖崇余題墨 夏園(우앙천고람작매화서옥도숭여제묵 하원)

오른쪽에 미덥고 이쁜 고람이 매화서옥도를 그리고 내가 발제를 써 채운다.

하원

 

() : 가리다. 막다. 차단하다

() : 다하다. 끝을 내다.

   위 시의 구성은 앞 4자가 주어이고 차, , 다는 자동사이며 뒤 2글자가 형용사다.

   한시는 오언절구, 칠언절구이던 4행을 기본으로 하며

    1, 2, 4행의 끝자의 음운이 비슷하며 3번째 행은 자유롭다. 그것이 음률(音律)이다.

   특히 24행은 분명히 지키며 남이 운을 뜨울 때나 차운(次韻)을 할 때는 반드시 운을 맞춘다.

   이 시의 음운은 분(), (), ()이다.

如許(여하) : 1. 이와 같다, 2. 허다하다.

只道......(지도...) : 무엇을 무엇이라 생각하다(말하다).

澷山(만산) : ()은 흩어지다. 질펀하다. 가득차다.이며 의 속자다. 만산은 온 산 가득이다.

() : 우러르다. 믿다. 따르다. 의지하다

() : 1.남자의 미칭, 2. 예쁘다. 3. 사위로 쓰일 때는 청으로 읽는다.

   정수동이 고람보다 17살이나 더 많다. 귀엽고 그 재주가 흐뭇했으리라.

() : 자전에 - ”, 充满 즉 채운다, 가득 채운다로 해한다.

    사용예> 主人坐奠爵于西楹南介右 再拜崇酒儀禮·鄕飮酒禮

 

정지윤(鄭芝潤1808(순조 8)1858(철종 9))

본관이 동래(東萊)이고 자()는 경안(景顔), 호는 하원(夏園)이며 이칭으로 정수동이라 불린다.

그의 집안은 왜어역관(倭語譯官)출신이다. 그의 부친도 아들도 역과에 합격했다.

도무지 생업에는 관심이 없고 조두순이 사역원 제조시절 판관을 내린 적이 있으나 7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술집에서 죽겠다는 시를 남기더니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의 집에서 만 50의 나이에 술로 죽었다.

그의 넘치는 일화는 각설하고

후배이자 친구인 최성환이 그의 글을 모아 펴낸 하원시초(夏園詩鈔)가 있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간결한 글이되 격에 벗어나지 않았다는 그가 쓴 위 제시(題詩)


명청교체기 기생 유여시(柳如是)와 결혼하고 10여만권의 장서를 둔 강운루를 지었고

허균의 재능만을 인정하고 난설헌의 시는 자기 아내의 시를 베꼈다고 혹평을 하고,

조선의 서산대사 부류를 띄엄띄엄한 선지식을 자랑하지 말라던

연암 박지원의 연구이후 조선 말기 문인의 교과서 같았던

전겸익(錢謙益1582-1664)이 쓴 시의 의미와 싯구를 베꼈다.


()이 된 전겸익의 시는 이렇다.

衆香庵自休長老 

略彴綠溪一徑分(약박록계일경분작은 나무 다리가 푸른 개울을 외 길로 나누고

千林香雪照斜曛(천림향설조사훈)  온 숲의 향기로운 눈이 기우는 햇살에 빛나네

道人不作尋花夢(도인부작심화몽도인은 꽃을 찾는 꿈을 꾸지 않고

只道漫山是白雲(지도만산시백운단지 온 산이 흰 눈으로 넘친다 여기네

 

위시의 네 번째 행을 그대로 고람의 화제로 쓴 것이다.

    

그리고 좌측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시제가 적혀있다.

橫煙臥雪一枝枝(횡연와설일지지비낀 연기와 누운 눈발은 가지마다 한결같고

不怕東風打短籬(불파동풍타단리낮은 울타리를 때리는 동풍을 두려워 않네

大庾顉頸千百樹(대유금경천백수대유령 고갯마루의 수많은 나무

飄零只向笛中吹(표령지향적중취이파리 흩날리니 그저 피릿 가락으로 길잡네

 

己酉蒲節希庵題(기유포절희암제)  기유년 단오날 희암이 적다.

 

(불파) : 두려움이 없다. 겁이 없다.

短籬(단리) : 키 낮은 울타리

大庾(대유) : 대유령(大庾嶺). 중국 5대 준령의 하나이며




    광동성, 호남성, 강서성의 분령으로 100km 넘게 뻗은 산맥의 고갯마루다.

   한 무제 때 유승(庾勝) 형제가 남월(南越)을 정벌하고, 이 고개를 지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당 현종 때 장구령(張九齡)이 매화를 심어 이 고개를 매령(梅嶺)이라고도 불렀다.

   쇠퇴를 거치다 송 문종 때 채정(蔡挺)이 다시 관문을 열고 매관(梅關)’이라는 표석을 세웠다.

飄零(표령) : 나뭇잎 등이 날려 떨어지다.

吹(취) : 바람, 취주악의 가락

蒲節(포절) : 창포절, 단오

希庵(희암)은 현기(玄錡 1809(순조 9)1860(철종 11))의 호다.

 그의 본관은 천녕(川寧)이고. 자는 신여(信汝)이며 그의 집안이 대대로 의과·역과·음양과에 급제하였고

 자신도 한어역과(漢語譯科)에 합격하였다.

 정수동과 같이 어려서부터 천재였으며 사람들이 시신(詩神)으로 불렸으나

 신분의 제약으로 낙담하여 평생 음주와 시문에 빠져 살았다.

 그를 따랐던 김석준이 간행한 희암시략(希庵詩略)11책이 있다.

 

화제에 나와 있는 기유(己酉)는 그림과 글에 관련된 사람들의 생존시기를 비교하면 1849년이다.

고람 전기가 25살이 되던 해이며,

소천 유재소가 21살이고 정지윤과 현기가 각각 4241살이 되는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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