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나대경의 산정일장

허접떼기 2018. 6. 1. 21:53


<김희겸의 산정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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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靜似太古 산정사태고  산은 먼 옛날처럼 고요하고

日長如小年 일장여소년  해는 어린 나이같이 길다

餘花猶可醉 여화유가취  남은 꽃도 되레 취할 만하고

好鳥不妨眠 호조불방면  예쁜 새는 잠을 방해하지 않는다

世味門常掩 세미문상엄  세상 맛에 문은 늘 닫았고

時光簟巳便 시광점사편  세월에 돗자리가 이미 편하다

夢中頻得句 몽중빈득구  꿈속에 자꾸 좋은 시구를 얻는데

拈筆又忘筌 염필우망전  붓 잡으면 또 잊어버리네.

 小年은 본래 음력1229일까지만 있는 작은 해를 뜻한다.

  위 그림처럼 少年이라고 쓰인 경우가 많은데 같은 의미일 것이다.

 世味는 세상맛이다. 世昧라 쓰는 예도 있다. ‘세상이 어둡다로 해석하는데

  시의 단어배열상 앞 2글자는 명사이지 문장이 아니어서 세미가 맞을 것 같다.

 亡筌得魚忘筌을 줄인 것이다. 고기를 잡고도 통발을 잊어버렸다는 뜻으로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위는 <송시초(宋詩鈔)>에 실린 오언율시(五言律詩)

唐庚(당경)醉眠(취면)이라는 시다.

 

당경(1071-1121)은 북송대 미주(眉州) 단릉(丹棱 : 현재 사천성 미산시 단릉현) 사람이다.

()가 자서(子西). 철종(哲宗) 친정시 진사에 급제하고 휘종(徽宗) 때 종자박사(宗子博士)가 되었다.

재상 장상영(張商英)의 천거로 경기상평(京畿常平)이 되었으나

장상영이 좇겨나 혜주(惠州:현재 광동성 혜주시)에 좌천되었다.

후에 승의랑(承議郎)에 복직하고 상청태평궁(上淸太平宮)을 지냈다.

소식(蘇軾:1037-1101. 東坡)을 매우 존경하였고 동향인데다 혜주에 머문 인연으로 소동파(小東坡)라 불렸다.

저서 <미산당선생문집(眉山唐先生文集)>이 있다.

그는 고심하며 시를 짓고 누차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아 비난도 있으나 간결하고 정밀함은 인정받았다

 

나대경(羅大經:1196-1242)은 길주(吉州) 여릉(廬陵:지금의 강서성 길안시) 사람이다.

자는 경륜(景綸)이나 자세한 생애가 알려져 있지 않다.

가정(嘉定) 연간에 태학생이 되고 보경(寶慶) 2(1226)에 진사(進士)가 된 뒤 말직에 있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후에는 여생을 한적히 산에서 보냈다고 한다.

鶴林玉露(한림옥로)이 책은 문인과 학자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일화나 견문 따위를 수록하여 독보적인 견해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일부 전거가 부정확한 것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1200년대 중반에 지어진 이 책은 현재 16권 본과 18본이 전하는데

중국에서는 주로 16권 본이 통용되나 일본으로 전해진 18권 본이 원 모습에 더 가깝다고 인정된다.

··3편 구성에 편마다 각 6권씩이며 글마다 소제목이 붙여져 있다는데,

<山靜日長>은 병편 권4에 있다. 조선에서는 중종 연간에 간행된 적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나대경의 <산정일장>은 당경의 시 첫 구를 인용한 다음, 자신의 일과와 산수를 설명하고 당경의 시를 논평한 글이다.

 

이 글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많이 읽히며 회자되었고,

산정일장이란 말은 산중의 고요함 가운데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이니 산속에서의 삶을 대변하는 말이 되었다.

중국의 명, 청대는 물론이고 조선에서도 이 글을 화제로 그림을 그린 이가 많다.

특히 김희겸(金喜謙)18세기에 이 글을 주제로 6폭의 그림을 그렸다하는데 3개의 그림이 전해진다.

 

鶴林玉露를 구하고 싶어 사이트를 찾아보니 제주도의 중국유학생으로 추정하는 이가 팔고 있었다.

그러나 글씨가 간자체라면 무의미하여 뜻을 접었다.

 

조선후기 정조대 실학자 이덕무의 손자 오주 이규경이

지금의 제천 덕산 도전리 삼전마을에 기거하며 저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거기에 소개된 나대경의鶴林玉露글을 고전번역원에서 찾았다(人事篇, 論學類, 爲學 14번째 <安貧守分辨證說>).

   

 

 <오순의 산수도, 호암미술관 소장>


<좌측 화제의 내용이다. 나대경의 산정일장 앞 부분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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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의 글에서 찾은 나대경의 이른바 <산정일장>을 적어본다.

 

宋羅大經鶴林玉露》。唐子西詩云

송나대경학림옥로당자서시운

송대 나대경의 학림옥로당자서(唐子西)의 시에 이르기를,

山靜似太古日長如小年

산정사태고 일장여소년

산은 먼 옛날같이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다라고 하였다.


余家深山之中每春夏之交蒼蘚盈階落花滿徑

여가심산지중매춘하지교창선영계낙화만경

나의 집은 깊은 산 중이라 매해 봄여름이 만나는 때면 푸른 이끼가 섬돌에 차오르고 떨어진 꽃이 산길에 가득하다.

蒼蘚(창선) : 푸른 이끼


門無剝啄松影參差禽聲上下

문무박탁송영참치금성상하

대문 두드리는 소리 없고 소나무 그림자는 들쭉날쭉, 새소리만 오르내린다.

剝啄(박탁) : 문을 두드리다,

參差(참치) : 參差不齊(참치부제) 길고 짧고 들쑥날쑥 가지런하지 아니함의 준말


午睡初足旋汲山泉拾松枝煮苦茗啜之

오수초족선급산천습송지자고명철지

낮잠이 비로소 그치면, 산의 샘물을 휘져 긷고, 솔가지 주워 쓴 차를 끓여 마신다. 


隨意讀周易》《國風》《左氏傳》《離騷太史公書及陶杜詩 韓蘇文數篇

수의독주역》《국풍》《좌씨전》《이소태사공서급도두시 한소문수편

마음 내키는 대로 주역이나 시경국풍, 좌씨춘추전이나 굴원의 <이소>, 사마천의 사기(史記)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 한유(韓愈)나 소식(蘇軾)의 산문 몇 편을 읽는다.

太史公書(태사공서) : 태사공은 태사령을 지낸 사마천의 이칭으로 史記를 말함  


從容步山徑撫松竹與麛犢共偃息於長林豐草間

종용보산경무송죽여미독공언식어장림풍초간

조용히 산길을 거닐며 소나무, 대나무를 어루만지고, 새끼 사슴과 송아지와 길게 뻗은 숲속 무성한 풀밭 사이에 누워 쉬기도 하며,

從容(종용) : 조용히의 원말, 麛犢(미독) : 새끼 사슴과 송아지


坐弄流泉漱齒濯足

좌롱류천수치탁족

앉아서 흐르는 샘물을 손장난하거나 양치질도 하고 발도 씻는다.

 

旣歸竹窓下則山妻稚子作筍蕨供麥飯欣然一飽

기귀죽창하즉산처치자작순궐공맥반흔연일포

이미 죽창 아래로 돌아오니 산에 사는 처와 어린 자식이 죽순과 고사리 반찬을 만들고 보리밥을 지어내니, 기분 좋게 한번 배부르다.

 

弄筆窓間隨大小作數十字

농필창간수대소작수십자

창가에서 붓을 놀려 크기대로 수십 글자를 써보고,


展所藏法帖筆蹟畫卷縱觀之

전소장법첩필적화권종관지

소장한 법첩이나 필적과 두루마리 그림을 펼쳐놓고 마음껏 보기도 한다.


興到則吟小詩或草玉露一兩段

흥도즉음소시혹초옥로일양단

흥이 나면 짧은 시를 읊거나, 혹은 옥로(玉露) 한두 단락 초안을 잡아본다.



나대경의 학림옥로는 산문집(散文集)으로 자신이 서문에서 밝혔듯 두보의 시에서 따다 지은 것이다.

두보의 증우십오사마(贈虞十五司馬)라는 시에 상쾌한 기운은 드넓은 금천(金天:가을하늘)과 같고,

맑은 말씀은 흠뻑 내린 옥로와 같아라[爽氣金天豁(상기금천활) 淸談玉露(청담옥로번)]”라는 구절이 있다.

  

再烹苦茗一杯出步溪邊

재팽고명일배출보계변

다시 쓴 차 한 잔을 끓여 마시고 나가서 시냇가를 거닐고,


解后園翁溪友問桑麻說粳稻

해후원옹계우문상마설갱도

밭의 노인과 냇가 친구를 만나 뽕과 삼농사를 물어보며, 벼농사 이야기한다.


量晴校雨探節數時相與劇談一餉

양청교우탐절수시상여극담일향

맑거나 비온 날을 헤아리고, 절기와 때를 따져보며 서로 잠시 유쾌한 말을 나눈다.

(),(),(),() : 모두 헤아리다, 따져본다는 뜻이 있다.

劇談(극담) : 쾌활한 이야기一餉(일향) : 짧은 시간.



歸而倚杖柴門之下則夕陽在山

귀이의장시문지하즉석양재산

돌아와 사립문 아래서 지팡이에 기대니, 석양은 산에 있고


紫綠萬狀變幻頃刻恍可人目

자록만상변환경각황가인목

자색 녹색의 만상이 종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변하니 황홀하여 볼 만하다.

變幻(변환) : 종잡을 수 없이 빠르게 바뀌는 변화

頃刻(경각) ; 아주 짧은 순간



牛背笛聲兩兩來歸而月印前溪矣

우배적성양량내귀이월인전계의

소잔등 피리소리, 짝지어 돌아오고 달이 앞 시내를 비춘다.

 

<오순의 산수도로 화제로  내키는대로 읽었다는 책과 글 목록을 적었다>



<김희겸의 이른바 '산처치자'다. 화제로 山妻稚子作筍蕨供麥飯를 적었다>



<김희겸의 이른바 적성래귀다. 笛聲 兩兩來歸를  적었다>

 

이어  나대경은 당경의 <취면>에 대한 감상과 평가를 적었다.

  

味子西此句可謂妙絶然此句妙矣識其妙者蓋少彼牽黃臂蒼馳獵於聲利之場者但見衮衮馬頭塵匆匆駒隙影耳

烏知此句之妙哉人能眞知此妙則東坡所謂無事此靜坐一日是兩日若活七十年便是百四十所得不已多乎

 

자서(子西)의 이 구절을 음미하니, 가히 묘절하다 하겠다. 그러니 이 구는 오묘하다. 이 오묘함을 아는 자는 대개 드물다.

저 누런 개를 이끌고 푸른 매를 팔뚝에 얹어 명성과 이익의 장터에 말타고 사냥질하는 자는

그저 커다랗게 말머리에 이는 먼지나 총총히 지나는 망아지 틈의 그림자만 볼뿐이니,

어찌 이 구절의 오묘함을 알겠는가! 사람들이 이 오묘함을 진정 안다면, 소동파가

일 없이 이렇게 고요히 앉아 있으니 하루가 이틀과 같다. 만약 칠십 살을 산다면 곧 백사십이 된다

라고 말한 바에 얻을 게 많지 않다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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