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봉 조희룡이 그린 梅花書屋圖(매화서옥도)다.
이 그림의 중간 오른쪽에 조희룡이 화제를 다음처럼 썼다. 그 화제를 해석해 본다.
蠹窠中得一故紙,乃廿載前所作梅花書屋圖也
두과중득일고지,내입재전소작매화서옥도야
蓋遊戱之筆而頗有奇氣 爲烟煤所昏殆若百年物
개유희지필이파유기기 위연매소혼태약백년물
畵梅如此況人乎 披拂之餘 不覺三生石上之感
화매여차황인호 피불지여 불각삼생석상지감
丹老
三生石(삼생석) : 불교의 삼생(전생,현생,내생)의 인연이 모두 적혀있다는 돌
좀 슬은 구멍에서 오랜 종이를 봤더니 이십 년 전 그린 매화서옥도였다.
그저 장난스런 필치이나 꽤 기이한 기운이 있고, 연기와 그을음으로 희미해 거의 약 백년은 된 것 같았다.
그려진 매화가 이 같으니 하물며 사람이랴! 헤쳐 털어보니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겠다!
단노
그림의 화제를 읽어보면 이 그림은 화제를 쓰기 이십 년 전에 그린 것이다.
관심없이 어딘 가에 쳐박아 두었다가 시간이 지나 꺼내보고 기분이 좋아 발제를 썼다는 것이니...
조희룡은 매화를 너무 좋아하여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에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침소에 두르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으며,
매화시백영(梅花詩百詠)을 지어 큰 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먹었으며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는 편액을 달고 자신의 호를 매수(梅叟)라고 하였다고 한다.
해외난묵(海外蘭墨)에 귀양 기간에도 날마다 매화 두어 장을 그렸다고도 한다.
이런 조희룡의 ‘매화벽(梅花癖)’을 그림에서도 본다.
어두운 밤 온통 매화로 둘러싸인 서옥에 앉아 있는 선비는
책상 위 병에 꽂힌 일지매(一枝梅)를 바라보고 있다.
비슷한 시기 여러 화가들이 ‘매화서옥도’를 그렸는데
이것은 송(宋)대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고, 사슴을 심부름꾼으로 부렸다는
임포(林逋)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조희룡의 호는 여러 가지다.
치운(致雲), 우봉(又峰), 석감(石憨), 철적(鐵笛), 호산(壺山),
단로(丹老), 매수(梅叟)등이다.
이 그림의 화제에 적힌 '단로'로 보아 나이가 들어 쓴 것 일 테다.
조희룡의 출생은 1789년이 맞다.
어디서 1797년으로 적었는데 아니다.
아울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그가 1813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고 하는데, 급제 사실은 틀린 말이다.
일단 식년문과는 1814년에 있었고 그 시험 병과에 급제한 조희룡은 본관을 함안으로 하며 진주에 살던 조득우의 아들 1780년생 조희룡이다.
그것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 함안 조희룡의 문과 급제 기록을 실고 있는 것이 우습다.
조희룡은 본관이 평양이다. 아울러 그의 부친은 조상연이며 서울사람이다.
조희룡이 오위장을 지냈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다.
순조 당시 평민의 급제율이 50%가 넘었다는 한영우의 논문이 있다.
韓 교수의 논지와 상응하게 조희룡의 집안은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이러저러한 사연이 있어 오위장에 임용되었을 개연은 시대상으로나 그의 할동상으로나 충분히 있다.
정옥자 교수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에
“개국 공신 조준(趙浚)의 15대 손이라 하나 가문이 한미해져서 아버지 상연은 벼슬이 없고 상연의 생부인 덕순(德純) 역시 벼슬을 못했다.
다만 상연이 양자로 들어간 숙부 덕인(德仁)이 인산첨사(麟山僉使)를 지냈을 뿐이며, 그의 벼슬은 오위장이었다.
조희룡의 맏아들 성현은 41세로 사망했고 둘째 아들 규현은 내수사 별제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까지 올랐다.”고 적었다.
오위장(五衛將)은 조선 후기에도 정3품의 벼슬이다.
물론 겸직이 많고 그저 직책만 있고 허직인 한직이기도 했지만 통정대부 이상은 당상관이다.
도승지, 대사성, 대사간, 병마.수군절도사와 위치가 같다.
또한 당시 양반이라도 4대에 걸쳐 벼슬을 하지 못하면 양반이라 할 수도 없다. 공납도 내야 했다.
1847년경 이른바 중인 위항 또는 여항의 친구모임인 벽오사(碧梧社)라는 동인이 조직되었다.
그 모임이 시작된 오동나무 집주인 유최진이 ‘오로회첩’에 신유년(1861년) 모임에 참가한 다섯 동인의 벼슬과 이름과 나이를 소개했다.
“첨추(僉樞) 조희룡은 호가 우봉으로 나이 73세이다”라고 하였다.
첨추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줄인 말로 중추부 정삼품 당상관 8명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위장을 지낸 이들이 주로 첨추에 오르게 된다. 고산 윤선도의 벼슬이기도 하지만
조선 후기 매관매직이 성행하였고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는 속담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위창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 보면
'키가 크고 준수하였으나 말라서 바람에 도포가 흔들리면 날라갈 정도였다고 한다.'
몸이 약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1866년까지 78살을 살다 갔는데 그 이유를 매화를 즐긴 덕이라 우봉 스스로 적었다.
그가 쓴 호산외사(壺山外史)에서 그와 어울린 평민 이하의 계층에 있는 인재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 준다.
조희룡은 특히 시ㆍ서ㆍ화를 즐긴 풍류 군주 헌종의 총애를 받았다.
헌종은 1846년(헌종 12년) 조희룡에게 금강산 그림을 그려 오라는 어명을 내려서 그에게 금강산 유람의 기회를 주었고,
1848년 중희당(重熙堂) 동쪽 소각(小閣)에 「문향실 聞香室」이라는 편액(扁額)을 달 때 조희룡에게 그 글씨를 맡겼다.
조희룡의 사람됨과 인생관을 살필 수 있는 어록이 있다.
“평생에 원업(寃業)을 짓지 않고, 먹을 것이 생기면 먹고 뜻이 다하면 시를 짓는다.
시를 얻지 못하면 모양을 다하여 그림을 그리고, 반드시 그림이 안 되면 여기에 잠시 기댈 뿐이다.”
조희룡을 김정희의 문인이라고 한다.
글씨는 구별하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1851년 철종은 조희룡이 김정희의 복심(腹心)이란 죄명으로 임자도로 귀향을 보냈다.
그런데 조희룡과 김정희는 세 살 차이며 김정희도 조희룡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조희룡도 임자도 생활을 기록하며 김정희에 대한 일구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김정희에 대해 토를 달면
썩 그리 인격이 고매한 자도 아니며 금수저로 태어나 옹방강을 만나 청의 문인화에 푹 빠져 산 사람이다.
조희룡과 자주 만나 교류한 것은 분명하나 사제 간은 아니고 인생관과 서화에 대한 인식도 달랐다.
신안에서 임자도를 잇는 다리가 2020년쯤 완공이 된다고 한다.
임자도에 조희룡의 흔적을 명소화하였다는데 가보고 싶다.
조희룡의 매화서옥도와 비교되는 전기와 소치의 작품도 적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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