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이인상 수하한담도 시제

허접떼기 2018. 5. 6. 22:55


능호관(凌壺觀) 이인상의 그림 수하한담도(樹下閑談圖)


자료를 보면 이인상은 참 좋은 친구를 많이도 두신 분이다.

자신의 호를 능호관이라 한 것도 보물 제1678호 예서 경재잠(敬齋箴)을 쓴 송문흠(宋文欽)

신소(申韶)등 벗에게 발의하여

이인상에게 남산자락에 집을 사 주고 그 집 이름을 능호관이라 지어준 것에서 유래한다.

신선들이 산다는 상상의 산 황호산을 능가할 만하다는 뜻을 가졌다.


이 그림에 시제를 쓴 이윤(李胤永)도 절친한 벗이다.

그림 우측 상단에 있는 이윤영의 시제는 이렇다.


 

老木蒼然色(노목창연색)  平巖閱古今(평암열고금)

  늙은 나무는 창연한 색이고, 평평한 바위는 옛과 지금을 보네.

相看知興會(상간지흥회)  魚鳥洞天深(어조동천심)

 서로 보며 아는 흥겨운 모임, 물고기 새가 노니는 깊은 별천지네.

禮卿詩胤之書

 예경의 시를 胤之(윤지)가 쓰다.

 예경은 숙종 대 좌의정이었던 정지화(鄭知和 1613-1688)의 字인데, 

 예경이 정지화인지는 모르겠다.


蒼然(창연) : 빛깔이 몹시 푸르다  날이 저물어 어둑하다  오래되어 예스런 느낌이 은근하다.

洞天(동천) : 하늘에 맞닿음  신선이 사는 곳, 별천지


胤之는 이윤영(1714-1759). 호는 丹陵(단릉)으로 후덕하고 명료했다고 한다.

예서와 전서에 뛰어나 이인상의 그림에 화제를 많이 썼고, 그림이 이인상과 구별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아버지 이기중이 단양군수를 지내 구담봉에 우화정을 짓고 은거했다.

 

그림 좌상단에는

위진시대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구수사언시 중시운병서(時運并序)」첫구절을

능호관이 썼다.


邁邁時運(매매시운)  穆穆良朝(목목량조)

 때는 끝없이 흘러가고, 화창하고 좋은 아침이네.

任氏宅閱函醉興寫   임씨 댁 편지를 열어보고 취중의 흥에 그린다.

 

邁邁(매매) : 돌아보지 않는 모양

穆穆(목목) : 언어 용모가 아름다운 삼가고 공경하는 화창한 조용한


그리고 능호관은 그림 좌하단에 그림을 그린 이유를 적었다.

任子伯玄心澹(임자백현심담)   임백현은 마음이 맑은데,

絶嗜好時强余作畵(절기호시강여작화때때로 억지로 내게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는 이름 뒤에 붙여 편한 상대에게 하는 그대라는 뜻이 있다.

伯玄은 임매(1711-1779). 1754(영조30) 진사시에 합격하고 용담현령을 지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11(1739)

유생이던 임매가 이미 끝난 일에 상소하다 과거응시 정지명령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은 '매우'라는 뜻이 있다.

旣成便一笑彈指而已(기성변일소탄지이이이미 끝내면 곧 한번 웃고 손가락을 튕길 뿐이고,

任人袖去(임인수거)                                 사람들이 소매에 넣고 가버리니

故任子簏中無麟祥畵(고임자록중무인상화때문에 임씨의 큰 상자 속에는 인상의 그림이 없다.

余復作此識其尾 (여부작차지기미)             내 다시 이걸 그려 이 끝에 적어

以沮人袖去(이저인수거)                          다른 사람이 소매에 넣고 가는 것을 막으려니

任子必哂余之多心(임자필신여지다심)        임씨는 분명 내 지나친 걱정에 비웃겠네.

 

 便은 여기서 문득, 곧의 변이라고 보며, 簏(록)은 대 상자이며,

 識(지)는 적는다는 의미는 '지'로 읽는다. 哂(신)은 비웃을 신이다.


위 그림의 주인공은 임매와 능호관 이인상일지 모른다. 

국립중앙박물관내 누가 그렸는지 모르는 이인상의 초상화를 보면 머리에 검은 두건을 썼다.

그래서 난 우측의 인물이 능호관이려니 한다.

만50을 살다간 능호관의 말년은 이천군 설성면 소재 내 어느 산중에 지은 초가집에서 지냈다.

어쩌면 그 초가 근처 계곡에서 친구를 만나는 모습을 그렸나보다.


이인상(1710-1760)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보산자(寶山子).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서 태어났다.

고조부는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敬輿)이나 증조부 이민계(敏啓)가 서자였기 때문에

1735(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서얼은 정6품이상의 직을 받지 못하는 제약이 있다.

음보(蔭補)로 한양의 북부참봉(北部參奉)을 지낸 후에는

전옥서 봉사(典獄署奉事)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와 경상도 함양 사근역(沙斤驛) 찰방(察訪)을 거쳐

1750년 정6품인 음죽현감이 되었다.

1752년 관찰사와의 불화로 현감을 사퇴한 후 평소 좋아하던 단양(丹陽)에 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음죽현 설성(雪城)에 종강모루(鍾崗茅樓)를 짓고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가정 형편이 궁핍하고 몸은 병약했으나 성격이 고결하고 강직했으며,

신분의 약점으로 노론 입장의 숭명배청(崇明排淸)을 끝까지 고수했다.

서자 출신이었지만 명문가 출신답게 시문과 학식이 뛰어나 당시 문사들의 존경을 받으며,

후대의 문인과 서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대의 많은 명유들과 교유하였는데,

이윤영(李胤永),송문흠(宋文欽)을 비롯한 김무택(金茂澤),황경원(黃景源),오재순(吳載純),

신소(申韶),윤심형(尹心衡) 등과 가깝게 지냈다.

··화 삼절(三絶)로 널리 추앙받았으며, 그림 이외에도 전서(篆書)와 전각(篆刻)을 잘했다.

글씨 중 해서체는 안진경(顔眞卿)을 따랐다.

전서체는 마음 내키는 대로 호기 있게 써서, 당시에도 기()하고 혹은 허()하다고 하였다.

김정희(金正喜)는 그 글씨를 높이 평가하면서 전각은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 없다.”고 상찬하였다.

20대 초기에는 남종화법에 의거한 화보(畵譜)나 조영석(趙榮祏) 등의 화풍을 주로 따랐고,

30대 중기에는 금강산 등지의 진경산수(眞景山水)와 문인들의 아취가 넘치는

청유(淸遊) 또는 시회(詩會)의 장면을 즐겨 그렸다.

그리고 40대 후기에는 은일자(隱逸者)의 심회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다루었다.


메마른 갈필선(渴筆線), 깔끔한 담채와 선염(渲染)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화풍은

당대 이윤영과 윤제홍(尹濟弘) 등에게 이어져 조선 후기 문인화의 일맥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옛 그림 속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희룡의 매화서옥도 화제  (0) 2019.01.24
나대경의 산정일장  (0) 2018.06.01
단원의 무인식성명 화제  (0) 2018.04.12
단원의 강산도 화제  (0) 2018.04.12
세마(洗馬)를 그린 그림  (0) 2018.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