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있는 것

매헌 윤봉길

허접떼기 2011. 3. 6. 21:43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당일(1932년 4월 29일) 윤봉길과 함께 아침을 먹은 사람은 김구였다.

김구는 당시 윤봉길이 논밭으로 힘든 일을 하러 가려고 농부가 자던 입에 일부러 밥을 넣듯이 했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

 

‘백범일지’는 계속된다.

“윤 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어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 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 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 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줬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 군이 ‘자동차 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 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윤봉길의 폭탄은 일왕 생일과 전승을 축하하는 기념식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같은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의 거사가 실패로 끝난 데 대한 아쉬움을 일시에 씻어주는 쾌거였다.

불과 몇 달 전인 1월 8일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던진 폭탄이 불발되자

중국 언론들은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不幸不中·불행부중)’고 썼다.

 

윤 의사의 거사 소식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동아일보 호외로 국내에 전해졌다.

첫 번째 호외에서는 거사자가 ‘조선인’, 부상자는 ‘시라카와 대장 및 시게미쓰 공사’라고만 했으나

두 번째 호외에서는 ‘윤봉길 이십오세’,

‘시라카와 안면 중상, 시게미쓰 오른쪽 다리 중상, 노무라 사령관 실명 염려…’라고 정확히 보도했다.

 

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의 전신)가 이날 석간에 ‘범인 같은 자’라고만 썼고

다른 신문들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이 사건을 보도했다.

 

이 거사는 조선인의 항일투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세계인에게 각인시켰다.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義士)가 능히 하니 장하다’고 평했다.

 

이후 중국정부는 임시정부를 동맹국 정부로 대우했고

조선의 청년들이 중국 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길을 열어주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연대투쟁도 본격화했다.

 

그해가 저물어가던 12월 20일,

동아일보는 “윤봉길은 17일 저녁때 대판(大阪·오사카) 위수구금소에서 금택(金澤·가네자와)으로 호송되어

19일 아침 7시 40분에 금택형무서에서 총살로 사형을 집행하.다”고 전했다.

 

광복 후 윤봉길의 유해는 가네자와 쓰레기소각장에서 발굴돼

1946년 6월 30일 백범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됐다.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이다.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

 

1913년부터 큰아버지 경(坰)에게 천자문을 배우다가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1920년경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어

사서삼경 등을 공부하고 시문집을 쓰기도 했다.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1915-2003)과 결혼하였다.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하기도 했다.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이때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1926년부터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에 힘을 쏟았다.

먼저 자신의 집에 야학당을 열어 문맹퇴치운동을 시작하였다.

야학의 교재로 지은≪농민독본(農民讀本)≫중의

 

"사람에게는 천부의 자유가 있다.…자유의 세상은 우리가 찾는다. 자유의 생각은 귀하다.

나에 대한 생각, 민중에 대한 생각,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에서 낳아진다"는

 

귀절은 이 시기 그의 사회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농민독본〉제1편은 현전하지 않고,

<계몽편>·<농민의 앞길> 2편이 남아 있는데,

<계몽편>은 예절 등 개인의 인간수업부터 시작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비유법적으로 일깨워주고 있으며,

<농민의 앞길>은 농민과 근로자 중심의 이상국가건설, 농민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등

농민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1928년에는 증산운동·구매조합조직·토산품애용·부업장려·생활개선을 통해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한 운동단체인 부흥원을 조직했다.

또한 독서회를 조직하고 계몽강연회와 토론회도 개최했으며,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를 설립해 운영함으로써 청소년들의 심신을 단련시켰다.

 

1929년 2월에는 부흥원 낙성식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야학아동 학예회에서

여우 같은 일본제국주의 당국을 규탄하는 풍자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여,

공연 다음날 덕산주재소에 호출당했다.

 

1929년 상부상조를 목표로 한 위친계(爲親契)를 조직했으며,

4월 23일 자작자급으로 힘을 길러 갱생하자는 취지로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발족 당시 회원은 38명이었으며,

매월 10전씩을 회비로 거두어 야학회·강연회 개최,

농가부업 장려, 소비조합 창설, 위생보건사업 추진 및 청소년체육발전 도모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윤봉길은

1928년 대한독립군단의 상하이 의거 특수공작원으로 국내에서 활동중이던 이흑룡(李黑龍)으로부터

국외의 독립운동전선의 형세를 전해듣는 한편,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민족운동에 대한 방향전환을 모색하다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편지를 남긴 채

가족도 모르게 집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도중 선천에서 체포되어 달포 가량 옥고를 치른 뒤

만주 안동현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의 김태식(金泰植)·한일진(韓一眞) 등과 함께 남만주·북만주를 돌아다니며

독립군의 근거지를 두루 살펴보고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했다.

 

이때 만주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참담한 생활을 본 뒤 각지에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고 계몽강연을 했다.

 

1930년 12월 칭다오(靑島)로 근거를 옮기고 다음해 여름까지 머물렀다.

낮에는 교포 세탁소의 회계원으로, 밤에는 야간노동강습회에 나가 활동을 하며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5월 상하이(上海)로 옮겨

모자제조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한인직공을 모아 공우친목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31년 7월 만주사변을 촉발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을 맞았다.

 

1931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해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교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말총모자 공장 미리공사(美利公司)에서 일을 하는 한편,

노동자 친목회와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발히 활동하면서 영어학교에도 다녔다.

 

 

1932년 상하이 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는 등 사태가 급격하게 진전되자,

김구는 급격하게 침체에 빠진 항일투쟁의 새로운 활로를 타개하는 한편,

만보산사건으로 악화된 한국·중국 양국민의 민족감정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상하이에 있는 일제의 군기창고 폭파계획을 진행시켰는데,

이때 윤봉길 등 6명이 하역인부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상하이 병공창(上海兵工廠) 주임 김홍일(金弘壹)이 맡은 시한폭탄 제조가 지연되어

거사에 들어가기도 전에 정전(停戰)이 됨에 따라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뒤 김구는 일제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전승축하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탐지하고

폭탄투척거사를 준비했다.

 

이 거사에 선발된 윤봉길은 4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는 내용의 입단선서를 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라고 선서하였다.

 

 

단원 중 한 사람인 이봉창(李奉昌)이 일왕 히로히토[裕仁]에게 폭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윤의사는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공원을 답사한 직후 홍커우 숙소인 동방공우(東方公寓)에 돌아와

백범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유언을 작성했다.

이 자리에서 윤의사는

거사가, 조선청년단에 대한 당부의 시,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의 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 등 4편의 시를

2시간여 만에 썼다

 

두 아들 종과 담에게 남긴 시에는 거사를 앞둔 비장한 심경과 자식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4월 29일 김홍일이 준비한 물통과 도시락에 장착한 폭탄을 식장에 던져

상하이 파견군 퐁사령관 시리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 등을 즉사시켰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 겐끼치[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마쓰 마모루[重光葵],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 및 물통으로 위장하려는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다시 바닥에 놓아둔 도시락 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이 덮쳤다. 윤봉길은 팔목이 잡힌 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

 

 

거사 직후 엄청나게 두들겨 맞아 질질 끌려가다 시피 체포되어

헌병대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고

5월 28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1월 18일 일본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로 후송되었다가 오사카상황이 안 좋아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육군 형무소로 옮겨졌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

 

그리고 다음 날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형무소에서

형틀에 묶인 사형수(윤봉길)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한복판에 표식도 없이 암매장되었다.

 

 

1946년 3월 6일 이봉창·백정기의 유해와 함께 발굴,

같은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3년 윤봉길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다.

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되고

같은해 6월 29일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1965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준위를 서울 조계사에서 발족되었다.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 경역이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78년 사당과 삼문을 전면 증축하고 충의사 정화사업이 준공되었다.

1987년 윤의사 의거 5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국민의 성금을 모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 -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세웠다.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이 있었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지금은 루쉰 공원)에도 기념관 매정(梅亭)이 있다.

 

 

김구는 예산 윤봉길의 생가를 찾아 기념 사진을 찍었다.

우측 끝이 윤의사의 처인 배용순이고 그 옆이 맏아들 윤종(1929-1984)이다. 윤담은 어려 죽었다.

윤종은 1남 6녀를 두었다

 

윤의사의 장손인 윤주웅씨(현대기아자동차연구소 근무) 와 그의 누이 윤주경 그리고 김구의 손자 김양

(당시 상하이 총영사)씨가 지난 2007년 루쉰공원(옛 홍구공원)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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