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있는 것

한국사 학계 1세대

허접떼기 2011. 3. 1. 01:14

 

나는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사실을 두고 두고 후회한 적이 많았다.

후회한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점이 더 부끄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배고프다는 학문 그러나 지적호기심을 만족시키기위해 배우고 싶었던 학문.

역사였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역사학이 가지고 있는 분쟁

특히 강단과 재야사학의 갈등,

그리고 이른바 이병도사단의 폐해 특히 교수의 임용과 자기학교 출신 선호.

 

아무도 관심 없는데도 어마어마한 수염고래를 잡아

조그만 식도로 분해하고 해부하여 그 실체를 알아내려는 사람들과

그들만의 팩트(FACT)를 바탕으로 끼니를 연명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불쌍한 원로들.

 

아직 찾아내지 못한 구석을 어거지로 뒤지면서 학위논문을 쓰는 중견들.

 

이젠 사료조차도 그 진위가 걱정되고 중국과 일본에 의해 강간당하고 있는 고대사.

 

 

정말 염증이 나 피하고 싶지만 우선은 차분한 마음으로

정련(精練)의 자세를 가지며 출발이 될 그 시점부터 나의 정리(整罹)를 해보고자 한다.

 

 

학교당시 고대사강의를 하셨던 지금은 퇴역하셨을

이융조 박물관장이 강의하실때마다. 한국사 교과서에 첫 장식을 한

이른바 한국사학계의 1세대 교수들에 대한 프로필을 늘어놓으면서

그들의 대다수가 이병도(1896-1989)의 후학들이라며

그들의 저술과 학풍에 대해서 가끔 자랑스런 메모리처럼 말하곤 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은 내 가까이에서 일찍이 존재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 책꽂이에서 처음 한국사 전반에 대해 통사로 기술한 책을 보았다.

 

 

한우근(韓㳓劤)의 <韓國通史>였다. 우는 삼수변의 오른우를 쓴다.

초기부족국가에서 고려까지 원시-고대-중세라는 시대구분으로 해석한 책이다.

한우근은 갑오년 동학란을 민중봉기라 처음 이름지은 사람이다.

그는 동경제대에서 서양사학을 배웠고

1947년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서양사학을 하신 덕인지 실증사학을 외치고 좋아했던 분이다.

 

 

 

 

 

 

[천관우와 그의 아내 최정옥 여사 --충주에서 기초수급자로 한 임대아파트에서 산다]

 

그리고 선친께서 사 두셨던 여러 한국사 관련 책들이 있었는 데 하나하나 열거하면

 

우선 <한국사의재발견> - 千寬宇.

나는 이 책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는 구절에 감격했었다.

 

 

천관우(1925-1991) 제천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유신반대인사였다는 점에서 그를 가까운 시각으로 기억했었다.

반독재 투쟁에 발벗고 나서「서서 죽을지언정 무릎끓고 살지 않겠다고 했던 분이다.

삼한사(三韓史) 고조선, 가야를 연구한 사람이다. 이분은 1949년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韓國史新論>과 그 저자 이기백(1924-2004)이다.

그의 종조부가 독립운동가 이승훈이다.

그야말로 식민사관과 대항하며 한국사의 시대구분과 한국사 전반 이곳 저곳,

예를 들어 신라의 정치 사상과 고려의 兵制, 고대사의 疆域 조선시대 정치제도 등등

안 건들인 곳이 없지만 그 당시 그만큼 논문을 낼 꺼리가 많았다는 반증이다

1947년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이 분의 동생이 국문학자 이기문이며 둘 다 학술원종신회원이셨다.

 

<韓國古代國家發達史> 김철준(1923-1989).

한반도 삼한, 즉 남부세력들이 중국 군,현의 지배를 받거나 조종되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개소리다. 당시 1세기 전후는 물론이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군.현의 장 따위가 주변나라를 지배한 저~억이 없다.

이분 1948년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부터 작고할때까지 국사편찬위원이셨다.

이분의 제자 노태돈이 고구려사를 공부하면서

삼국통일이 동아시아정세에 복합적인 국제전이였음을 공표하면서 스승을 제껴 버렸다.

 

 

<韓國史辭典> 유홍렬(1911-1995).

이 조그만 사전 덕에 한국사 전반의 용어와 인물검색이 쉬웠었다. 컴터도 없고 인터넷이 없던 80년대가 아닌가!

 

 

그리고 대학 때 제목에 눈멀어 샀던 <한국의 미술(고대)>

이 책의 저자가 한국고대사의 선발주자인 김원룡(1922-1994)이다.

1945년 경성제대 사학과를 나온 분인데

그 유명한 백제 무령왕릉을 하루만에 발굴하신 분이다.

신라고분 중 이분 손에 발굴되지 아니한 무덤이 없을 정도로

고고미술학계에 태두라 불리는 분이다.

지금의 고고인류학, 고고미술사학의 창시자라 할 분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신라 석굴암이 기하학적 분석과 완벽한 미의 결정체라고 칭찬한 점이 기억난다.

 

《한국 구석기학 연구의 길잡이》(1988년) 손보기(1922-2010)

194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를 1회로 졸업하였다. 

1964년부터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87년 퇴임하였다.

1964년의 충남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로 널리 알려졌다.

1974년 ~ 1980년에는 충북 제천의 점말동굴유적을 발굴하였으며, 

1972년에는 직지심경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임을 주장하고,

이해 활자를 연구한 공로로 독일 마인츠시에서 메달을 받는 등,고인쇄술 연구에도 기여한 분이다.

 

 

그리고 <韓國近代農業史硏究> 김용섭(金容燮1931- )

1960년대부터 일제의 식민사관 극복을 위해 힘썼으며,

1975년부터 연세대사학을 이끌면서

특히 조선후기의 농업경제사를 치밀하게 연구하여 내재적 발전론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생겼던 한국사학계의 이론적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역사 인식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서울대 51학번이시다. 그가 이융조의 스승이 된다.

 

 

  

<한국의 과거제도> 이성무(李成茂 1937- )

이분 충북 괴산사람이시다.

1960년 서울대 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인데 주로 조선시대사 권위자다.

 

 

 

 

 

 

 

 

 

 

 

 

<韓國精神史序說>의 홍이섭(洪以燮1914-1974) 특이한 분이다.

연세대를 나와 연세대에서 조선과학사를 처음으로 정리하였고 카톨릭 신자여선지

다산 정약용의 사상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본격적으로 집대성한 분이며 思想史에 관심을 많이 두더니

조선독립사상연구에 골몰한 분이다.

 

 

이렇듯 가히 비슷한 시기에 서울대를 나왔고 지금까지도 한국역사의 강단사학의 거두들의 면면은 엄청나다.

이들의 스승이 되는 이병도의 위력을 제하고는 한국사의 집필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병도와 성격은 비슷하지만 모양새를 달리하셨으며

이른바 학술원종신회원으로 등재되신 분들의 명예는 자못 위대하기 까지 한다.

 

  한국고대사(韓國古代史)를 연구한 광복 후 첫 세대에 속하는 대표적인 역사학자들이다.

한우근(韓㳓劤)․이기백(李基白)․전해종(全海宗)․고병익(高柄翊)․민석홍(閔錫泓)․김원룡(金元龍)․천관우(千寬宇)․

손보기(孫寶基)․최영희(崔泳禧)․길현모(吉玄謨)․이보형(李普珩)․이광린(李光麟)․이용범(李龍範) 등이

이른바 한국사학계의 1세대들이다.

 

이들은 이병도(李丙燾)․김상기(金庠基)․류홍열(柳洪烈)․신석호(申奭鎬)․홍이섭(洪以燮)․이홍직(李弘稙)․

조의설(趙義卨)․손진태(孫晉泰) 선생 등의 제자들로서 실증사학(實證史學)의 학풍을 가지고 있었다.

 

실증사학이 일본에서 도입된 랑케(Ranke)사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일본 근대사학의 학풍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계는 있으나 긍정적으로 보면

해방조국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새롭게 밝혀 보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한 세대이기도 하다.

 

 

 

사실 이병도가 1986년 뒤늦게 단군신화를 부정하고 단군의 실재를 주창하였다.

그것은 그즘에 불기 시작한 환단고기 등 출판과

일제에 의해 왜곡된 거대한 몸뚱아리를

아주 조금씩 회를 떠내기 시작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던게 시니컬하지만.

 

이들이 모두 엄청난 불법의 죄인이라 몰아 부칠 생각은 없다.

 

이병도는 원래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역사를 배우기 위해 와세다대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서양사교수인 게무리야먀센타로의 영향하에 사회진화론을 배웠고

일본사교수인 요시다도고(吉田東伍)의 <도서일본사>를 읽으면서

한국사에 관심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의 실증사학거두인 두 인물 쓰다소우끼치(津田左右吉)와

조선사교수 이케우치(池內宏)를 통해 처음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접하고

두 사람의 자극과 영향으로 독학으로 한국사를 연구하여

<고구려 대청.당 항쟁사연구>를 3.1운동이 일어난 시기에 졸업논문을 발표했다.

두 일본인은 문제의 임나일본부설의 원조이기도 하다.

 

이케우치의 주선으로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될 당시의 나이가 30대였다.

 

이병도와 더불어 한국사의 태사이신 두 분을 알아보자.

김상기와 신석호 두분이다.

 

 

김상기(1901-1977)는

최보열(崔輔烈)과 최병심(崔秉心)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926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부터 경성대학 법문학부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김상기는 특히 동양사 연구에 주력하여 1934년 이병도와 더불어 진단학회를 조직하여

름으로 1943년 일제에 의해 해산될 때 까지 일본에 저항한 단체라며 자부심을 가진 분이시다.

그 후에 서지학회[1945]와 중국학회[1962]·백산학회[1966]·한국고고학협회[1967] 등을 조직하거나

혹은 초대 회장을 지냈다.

학술원 회원[1954~1977]·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서 활동하였고,

그분이 원래 근엄인자하신 분이였다한다.

그 분의 훈육을 받은 분들이

전해종(全海宗)·고병익(高柄翊)·이용범(李龍範)·함홍근(咸洪根)·민두기(閔斗基) 등인데

쟁쟁한 한국의 동양사학 1세대들이다.

 

 

 

 

그 다음 신석호(1904-1981)

1926년 경성제대법문학부 사학과를 나와

1929년 조선사편수회 촉탁을 거쳐 수사관(修史官)을 역임하고

1934년 진단학회 발기인이되고

1945년 이병도, 김상기와 더불어 임시중등국사교원양성소를 설치한 장본인이다

1958년 한국사학회를 조직 이사장이 되었으며

1967년 한국사학연구회를 조직 그 회장이 된 분이다.

그는 고려대, 성균관대, 영남대 교수를 지냈다.

 

 

이 세분과 비슷한 시기인

1922년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들어가 신간회 동경지회원이던 이선근(1905-1983).

1929년 졸업 후 조선일보에 입사 정치부장과 편집부장을 지내고

1937년 만주에서 만몽산업(滿蒙産業) 상무이사와 전무이사를 지냈다.

이 만몽산업에 다닐 때의 친일행적이 밝혀졌다.

1946년 광복 후 반탁학생총연맹 고문을 지내는고 1954년 문교부장관, 1957년 성균대총장, 1969년 영남대총장,

1974년 동국대총장, 1976년 대한교육연합회장,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대원장 등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역대정권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위인이시다.

 

잘못된 역사인식이 위험한 이유는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조차 망각하는 뻔뻔함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지금도 이들이 잘못 해석한 민족의 자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새롭게 알아야할 의무가 있을 것이다.

 

 

그저 리포트를 제출하는 심정에서 첫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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