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있는 것

윤봉길과 정당화 - 3.1 다큐를 본 후

허접떼기 2011. 3. 1. 15:12

 

 

 

물병폭탄 투하 후 일본군경에 의해 붙잡혔다는 윤봉길의 사진 진위여부를 SBS 3.1절 특집다큐에서 다뤄 보게 되었다.

다큐의 내용을 요점정리한다.

 

 

 

 

 

 

 

 

 

 

 

 

 

 

 

 

 

 

 

 

아사히 신문 호외에 게재된 사진

 

일본군이 외국신문사에 제공한 사진

 

2007년부터 시작된 이 체포 사진 속 인물이 윤봉길이냐 아니냐는 논란으로

끝내는 그해 교과서에 체포 사진은 사라졌고 태극기를 뒤로 하고 수류탄을 들고 선 모습으로 대체되어

윤봉길의 대표적 교과서 사진이 되었다.

 

 

신문에 게재된 위 두 사진의 인물이 누구인지의 논란은 2008년 TV에서 다큐로 다뤄졌는데

유족은 윤봉길이 맞는 것 같다.

기념회 측은 아니라고 반박할 증빙이 없고 국가보훈처의 요청으로 독립기념관사업회에 의뢰한 결과

김구가 썼다고 하는 도왜일기(屠倭日記)에 의거 사진 속 인물이 윤봉길이 맞다고 판단하는 자료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그 와중에 사진의 인물이 윤봉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바로 강효식 경희대국제법무대학원 교수였다.

 

이를 오늘 다큐에서 다시 조명하여 그 사진의 인물은 아사히가 호외로 첫 보도된 사진인데

당시의 기술로 연행현장을 3장이나 찍을 카메라는 없다는 것과

위에 나타난 두 사람도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CG를 통한 추정을 제시했으며,

 

일본 쇼와여대 안조 유코라는 복식연구가의 인터뷰를 통해

'이 복장이 새비로라고 한다면 틀린 것이며,

그런 일을 벌인 사람을 이렇게 두 손을 묶지 않고 연행한다는 것이 의아스럽다'며 다시금 위작일 가능성을 보였다.

 

 

위작이라면 가벼이 넘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작진의 의도처럼 사진 한 장은 그 무엇보다 진실성을 가진다.

사진 한 장을 조작하여 역사를 기만하는 세력은 존재한다.

 

얼마전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독립운동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는 내용이 등장하여 많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기도 했던 교과서가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나는 역사가 객관을 서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역사적 편찬물은 그 나라를 살던 사람의 주관으로 편찬된 저서를 객관적 사실로 보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관이 섞인 근거를 가지고 객관을 논하고 있다.

그렇기에 역사는 객관적 사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생각을 배우고 정신을 배우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한국은 현재 이런 역사에 대한 자세가 여러 가지다 보니 이러한 논쟁이 일어났다고 생각된다.

 

어떠한 사실을 가지고 다른 해석이 나오기에 이러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사히를 비롯한 당시 상하이 주재 미,영의 신문기사를 FACT로 인정하고 자신의 논문에 인용한 역사학자도

그 사람에게는 사진 속의 인물이 윤봉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며

최소한 영역으로 그에게는 그것이 진실일수 있는 것이다.

 

한 인물의 평가는 그가 서 있는 시공간에 의해서 다른 것이다.

 

 

 

1932년7월에 박헌영(1900-1955, 윤봉길과 고향이 같은 예산이다)은

'상해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언급하는데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를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 고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없는 극소수의 활동'이라고 비판하며

개인적인 테러와 공산주의의 입장을 피력했다.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에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중국의 주석 장제스는

이후 윤봉길의 상해 의거를 높이 평가하여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윤봉길이 해냈다며 극찬하고,

이후 임시정부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소해 장건상(1882-1974)은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개석이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푼도 도우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

 

 

 

 

 

 

독립운동가 겸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병문화시킨 것의 원인이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였지만

의거 자체에 대해서는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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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가 이 자리에서 거론하고자 하는 점은 '정당한'폭력에 의한 또 다른 폭력은 정당한 것인가? 이다.

 

 

2007년 한겨레칼럼에서 박노자가 언급한 기사가 떠오른다.

<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을 두루 보지만 가끔 거의 억지로 볼 때가 있다.

이라크 무장 독립운동을 ‘반군’(insurgents)이라고 지칭하는 글들을 보는 것이 역겹기 때문이다.

의병이나 독립군 유격대들을 ‘폭도’라고 지칭했던 일제 어용지들과,

저 미국의 일간지들이 무엇이 다른가?

‘합방’ 전후의 조선과 오늘날의 이라크의 차이라면,

전자는 무기와 병사들이 태부족해서 무장 독립운동으로 외적을 내몰 힘이 없어

국민국가를 끝내 만들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데 반해

후자는 후세인 시절 정규군의 장비와 인력을 물려받아 침략군에게 커다란 손실을 입힐 힘을 가진 것이다.

 

물론 절대적 도덕 차원에서는 어떤 폭력도 궁극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지만,

적어도 국제법 차원에서 따져본다면

유엔 헌장(제2조 4항)을 위반하는, ‘침략’이라는 국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군인이나 현지 부역자들에 대한

저항세력의 공격은 ‘반군의 테러’라기보다는 방어권의 행사일 뿐이다.

 

그런데 침략군과 그 부역자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공격이 정당방어라 해도,

이것이 과연 문제없는 방어 수단인가?

지금 이라크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공격들의 효과가 세계 초강대국의 침략·식민화 계획을 위기에 빠뜨릴 정도로 클 수 있지만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다.

 

미군을 표적으로 하는 많은 공격에서,

그저 그 자리에 우연히 있던 이라크 양민들이 무고하게 죽고 다친다.

아무리 ‘약자의 저항’이라 해도, 폭력이란 과연 늘 완벽하게 의도대로 실행될 수 있는가? >

 

 

윤봉길이전의 한국독립운동사에도 '정당한 폭력의 무고한 희생자’ 문제에 부딪진 적이 있다.

 

1909년 12월22일,

 

젊은 기독교인 이재명이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추도회에 참석했다가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 매국노 이완용에게 ‘정의의 칼’을 겨누었다.

 

이완용이 중상을 입었음에도 살아남게 된 이유는,

이재명의 길을 우연히 인력거꾼 박원문이 막았기 때문이다.

 

‘매국’을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었던

평민 박원문이 이재명의 다급한 칼에 찔려 죽었고, 이완용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이완용에 대한 이재명의 공격이 정당화될 수 있다 해도,

매국노를 인력거에 태워준 죄(?) 이외에

별다른 죄를 저지른 일이 없던 박원문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 정의인가?

 

일제는 일제대로 박원문의 죽음을 이용해 이완용의 암살미수건만으로 사형을 받을 수 없던 이재명에게

‘박원문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에 처했다.

 

이재명이 공판에서

박원문을 죽인 것이 ‘우연’이었음을 강조하고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무지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적이 없다.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평민 하나쯤 목숨을 잃는 것은 당시에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별다른 고심거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외적의 괴수 곁에 우연히 섰다가 민족 투사의 의탄(義彈)에 맞아 무고하게 쓰러지는 ‘의도되지 않은 희생’의 문제는,

그 뒤에도 한국 독립운동에 어두운 그늘을 계속 드리웠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아나키즘 경향의 ‘직접 행동’ 단체인 의열단이 1922년 3월28일 상하이 부둣가에서

일제의 해외 침략정책의 입안자였던 다나카 기이치(1864~1929) 남작에게 총탄과 폭탄 세례를 준비했는데,

 당시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왼쪽·훗날 총리대신 시절)와

 암살을 시도했던 3명의 의열단원 중 한사람인 김익상 선생(오른쪽).

 

여의치 않게 다나카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채

총소리에 놀라 다나카를 껴안은 브라질 출신의 미국 여성 스니더 부인을 오살하고

몇 명의 미국인, 영국인, 중국인에게 부상을 입히고 말았다.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다가 아무 죄도 없이 고통스럽게 죽어간 스니더 부인의 참사는

상하이의 외국 조계를 경악게 해 한국 독립운동 전체에 대한 탄압 강화로 이어졌다.

 

‘무고한 희생자’의 문제와 함께 저항 방법으로서의 테러를 의심케 하는 부분은,

폭력이 일상화되면 저항 주체 사이의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도 전락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보통 독립운동의 역사를 ‘왜적과의 싸움의 역사’로 보지만

실제로는 독립투쟁에서도 내부적인 권력 쟁투 양상이 적지 않았으며 때로는 폭력적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동류를 향한 폭력의 주체가 저명한 독립운동가라고 해서 과연 그 폭력이 무조건 선한 것이던가?

 

1922년 초기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인사회당(고려공산당)의 간부인 김립(1880~1922)을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을 유용했다”고 성토한 데 이어

김구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1922년 2월11일에 상하이의 거리에서 김립을 사살했다.

 

이 암살을 ‘정당한 응징’으로 묘사한 <백범일지>의 권위가 절대적이기에

김립이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통설을 의심한 이들이 여태까지 거의 없었지만,

 

반병률 교수(한국외대)의 연구에 의하면 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정적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 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

백범의 허물을 거론하는 자들의 주요 테마이다.

 

자금 문제를 놓고 그 뒤에도 우파 민족주의자들에게 ‘동족 테러’가 빈번히 이용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장 독립운동의 비극적인 이면이다.

 

 

중국을 무대로 한 무장 독립투쟁에서

중국인이나 외국인이 우연히 희생됐을 때 여론 악화가 뒤따르곤 했지만,

한국 쪽에서도 중국 쪽에서도

특히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된 1930년대에 들어와 일본 민간인의 피해에 별다른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1932년 4월29일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 때

일본인 사진기자를 비롯한 수명의 일본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음에도,

침략 원흉들의 폭살과 부상에 기뻐하고 있던 중국 여론은 이를 인식하지 않았다.

 

테러로 피해를 입어도 피침 지역의 현지인들에게 동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침략적 야심을 견제할 줄 모르는 ‘말 잘 듣는’ 침략국 민중이 받는 집단적 업보라 할까?

 

윤봉길의 의거가 중국의 항일 저항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었지만,

한편으로는 상하이에서 살고 있던 조선인 민족운동가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불러왔다.

 

 

지금의 이라크 상황을 본다면 윤봉길과 비슷한 방법들을 이용하고 있는 무장 투쟁이 성공할 확률도 적지 않지만,

과연 소수의 저항 집단이 만드는 독립국가는 민중적, 민주적, 인권적 모습을 띨 것인가?

 

최고의 빨치산 대장이 결국 최악의 독재자로 변신한 한반도 현대사의 교훈을 염두에 둬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나는 윤봉길의 인격과 업적에 존경심을 가진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여러 가지를 알고 싶었고, 다큐를 보면서 또 다른 시선이 떠올라 언급한 것이다.

 

 

대한독립의 의사 윤봉길에 대한 정보도 내 블로그에 싣는 것으로 그 존경심을 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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