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면서

희양산 봉암사에 대해

허접떼기 2011. 2. 14. 14:23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경북 문경 가은읍 원북리 485번지 희양산(曦陽山,999.1m) 기슭에 자리한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창건한 고찰이다. 

지증의 이름은 도헌(道憲)이고 자는 지선(智詵)이며 속성은 김씨로서 경주 사람이다(824~882).

지증대사가 절을 세우기를 마음먹고 유랑 중에 심충(沈忠)이란 사람의 청으로 현 봉암사 자리를 결정하고 그 자리에 있던 큰 못을 메우려고 하는데 큰 용(龍)이 살고 있는지라

지증대사는 신통력으로 그 용을 구룡봉(九龍峰)으로 쫓아 버리고는 땅을 매립하여 그 자리에 봉암사를 세웠다고 한다.

 

 

백운곡(白雲谷)에는 계암(鷄岩)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봉암사를 창건할 당시 날마다 그 바위 위에서 닭 한 마리가 새벽을 알렸다고 한다. 그래서 절 이름을 봉암사(鳳岩寺)라고 이른다고 하는 글이 전한다.

(上下有白雲之間有鷄岩者 人傳昔日創寺時 有鷄 常報曉於岩上 寺之得名鳳岩者此也) 

 

그 후 지증국사의 문손(文孫,문중의 후세)들이 국사의 뒤를 이어 절을 중수(重修)하였는데, 웅장하고 예술의 극치를 다한 건물이 즐비했다고 한다. 중창 80년 후에 극락전(極樂殿) 한 동만 남기고 전소(全燒)되고 말았다.  

그 후 고려 초에 정진국사(靜眞國師)가 이 절에 있으면서 절을 중창하여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구산산문 하나가 탄생되는 것이다. 바로 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은 고려 태조 18년인 935년에 정진국사(靜眞國師) 긍양(兢讓)이 개창한 산문이다. 희양산문의 개조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선문조사예참의문(禪門祖師禮懺儀文)에 따르면 지증도헌(智證道憲)이 개산조사로 되어 있다. 긍양이냐 지증국사 도헌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하지만 긍양개산조사파에선 도헌이 봉암사를 먼저 세우기는 했어도 그를 희양산문의 개산조사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도헌이 북종선의 맥을 이었기 때문이다.아직도 이에 대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사례로 보건대 도헌과 긍양 어느 쪽으로도 쉽사리 무게중심이 옮겨 갈 것 같지는 않다. 긍양은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의 신뢰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형초 등 많은 제자를 거느려 희양산문의 선풍을 확립했다.

 

                         태고선원이다. 그래서 등산로도 폐쇄한 적이 있다.

 

이 절은 ’82년 이후 4월 초파일에만 문을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그래서 여러 인터넷 자료를 뒤졌다. 그래서 어느 정도 안 가봐도 알게 되었다. 나의 잡설을 시작하기 전에 절이 절 같지 않게 느껴지는 요즘 그래도 절 같은 곳이 봉암사라는 거다. 그 중 몇 가지 기본 건물부터 보자. 일단 오래되었던 그러나 본형은 아닌듯한 극락전부터 본다

 

극락전은 목탑형(木塔形)으로 지어진 건물로 경순왕이 견훤에게 쫓겨 이곳으로 피난할 때 원당(願堂,소원을 빌기 위해 지은 집)으로 세운 유서 깊은 전각(殿閣)이며, 임진왜란 때에도 봉암사의 다른 건물은 병화(兵火)로 전소되었으나, 이 극락전만은 장작개비에 불을 붙여 지붕에 올려놓았더니 장작개비는 날려 갈 뿐 신기하게도 불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왜병들은 극락전 소각을 단념하고 말았다고 한다. 유일하게도 수차례의 큰 화재에도 버텨온 이 극락전의 건축양식은 신라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전하는 목탑형의 건물이다. 일제 때 옥개보수가 있어 망와에 소화16년(1942)이라 적혀있다. 경북지방문화재에 불과하다.

사모지붕의 건물로 내부에는 소규모의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극락 회상도가 있다.

 

봉암사의 중간 사적(事蹟)이 전하지 않아 그 내력을 알 수 없으나 여러 번 중수를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란에도 크게 소실되었던 것을 현종17년(1674)에 신화(信和순)가 중건하였고 순종 원년(1907)에도 화재로 대웅전이 소실되었으며 1956년 4월 7일에도 큰 화재로 여러 채가 소실되었다. 

봉암사는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신라 하대부터 고려 초기에 걸쳐 달마의 禪法을 종지로 삼아 그 門風을 유지해 온 아홉 불교 禪派)중의 하나로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유서 깊은 사찰인 덕분으로 한 때 폐사의 위기에까지 이르렀으나 이제는 중창을 거듭해 옛 모습을 되찾고 많은 수도승이 운집하여 수도에 전념하고 있다. 1992년 6월 4일에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완성되었다.

 

대웅보전은 실상 볼 게 없다. 대웅보전은 108평의 웅장한 건물이며 삼존불(석가모니불·문수·보현보살)을 모시고 목각탱 또한 뛰어난 솜씨의 수작으로 매우 장엄하다. 올라가는 계단과 문짝의 꽃창살 무늬는 다양하게 다 달랐다.

 

 

앞 마당에는 노주석이라 하여 양쪽에 돌 받침이 있는데, 한밤중 행사가 있을 때 관솔불을 피워 올렸던 것이라 한다. 즉 행사용 조명시설이다. 순 우리말로는 불우리라 한다.

 

 

절의 중심인 대웅전 앞에는 탑이 서게 된다. 본디 대웅전이 따로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 그 대웅전은 금색전(金色殿)이란 현판을 달고 원 자리의 현판은 글씨가 아까워선지 뒤에 달아놓았다. 금색전의 의미를 도무지 모르겠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신사 도쿄 도쇼궁(東京東照宮 동경동조궁)의 건물은 몽땅 금박을 해서 금색전이라 불리는 데 이놈은 글씨만 금색일뿐..

 

 

 

 

                        그나마 삼층석탑이 가람의 멋을 주는 유일한 문화재다.

  

이 절에서 가정 중요한 보물은 바로 작년 2009년 12월 30일 보물 제138호에서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된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다. 지금까지 국보지정 중 맨 마지막이 바로 이 탑비이다. 지증대사의 적조탑(부도)과 탑비는 대웅보전에서 서북쪽편 전각안에 양 옆으로 있다. 이 중 부도는 지증의 입적 후 883년 신라 헌강왕 8년 음력 12월(883)에 팔각원 당형을 기본으로 하여 세운 것이다.

 

                            좌-지증대사적조탑비 우-지증대사 부도 -- 보수 공사 전 사진(1927년 윤세옥이 비각을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