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면서

[스크랩] 화엄사 종소리에 갇히다 1

허접떼기 2016. 6. 13. 10:59

화엄사는 이십대에 서너 차례 갔었다. 그중에 경삼이와 함께 겨울에 오른 기억도 있다. 화엄사 뒷길로 노고단에 올랐었다. 30년이 훌쩍 지났다.

적과를 대충 훑고 情人과 두서없이 향했다. 길이 좋아졌다. 특히 전라도로 향하는 길은 많이 좋아졌다. 고속도로라고 해야 2차선이었던 때도 있었다.

오후 2시 반을 넘겨 출발하여 다섯 시 경에 금강문 앞 다리를 건너 주차했다.

묘지 문제로 절에 시위중인 천막 앞에 나는 나야하며 서있는 수리된 일주문의 위용은 흐뭇했다.


선조의 9명의 후궁 중 두 번째 인빈 김씨의 네 번째 아들인 의창군(義昌君) ()이 숭정(崇禎)9년이니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 가을에 쓴 현판이다.




화엄사는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544(신라 진흥왕 5)에 인도 승려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전하고 있다.

677(신라 문무왕 17)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10(華嚴十刹)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이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장륙전(丈六殿)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때 비로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
<사지(寺誌)>에서는 당시의 화엄사는 가람 8() 81() 규모의 대사찰로 이른바
화엄 불국세계(佛國世界)를 이루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하였고 고려시대에 네 차례의 중수를 거쳐 보존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당시 전소되고 승려들 또한 학살당하였다.

범종은 왜군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섬진강을 건너다가 배가 전복되어 강에 빠졌다고 전한다.

장륙전을 두르고 있던 석경은 파편이 되어 돌무더기로 쌓여져오다가 현재는 각황전(覺皇殿) 안에 일부가 보관되고 있다.


1630(인조 8)에 벽암대사(碧巖大師)가 크게 중수를 시작하여 7년 만에 몇몇 건물을 세워 화엄사를 다시 일으켰고, 그 뜻을 이어 계파대사(桂波)가 각황전을 완공하였다.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공양한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2호인 석등(石燈),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이 있으며,

보물 제132호인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 보물 제133호인 서오층석탑, 보물 제300호인 원통전전 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이 있다.

우리나라의 오래되고 유명한 모든 절은 1700년경 숙종대에 중수되고 보수된다.


이런 이유로 벽암대사를 기리는 비문을 들어오는 길에 소중히 둔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 오른 편 석단에 이런 글씨를 새겨 놓았다.


일체유심조, 그렇다 모두 맘먹기 달린 것이다.

 

화엄의 근본 사상이다. 원효의 해골바가지 물에 의한 깨달음이며 의상이 당나라에서 배워온 화엄의 근간이다.

글씨는 지금도 활동하는 광주출신 학정 이돈흥이 썼다. 화엄사, 학정의 글씨는 보제루 주련과 대웅전 쪽문에도 있다.

   

 

사천왕은 세계 중심이라는 수미산 중턱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고 귀의자를 지켜주는 4대천왕으로 제석천을 섬긴다는 북다문천 동지국천 남증장천 서광목천이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보제루라는 누각이 나온다. 그러나, 누각 아래를 지날 수 없다. 이유는 뭘까?


보제루가 누각이였다면 보제루를 지나 열리는 마당 위의 대웅전이 돋보이게 될 일이다.

그래서 좌우로 돌아 높은 석단 위의 각황전을 보게 만든 시각적 이유와 집중과 몰입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보제(普濟)는 '널리 구한다'는 뜻이다.





보제루 뒤는 '화장'이라는 이름의 현판을 달았다. '화엄경을 간직하다'로 보련다.


빗살창에 모란꽃이 솟을 문양으로 같이 얽혀 조각됐다.


 티비에서 무비(無比)스님의 화엄경 강의를 본 적이 있다. 절에 가면 그래서 주련에 눈이 간다.

누가 썼는지 어떤 내용인지!

학정이 보제루 주련에 화엄경 현수품의 글을 써놓았다. 주련의 글씨를 읽어보면 이런 뜻이다.


信爲道元功德母(신위도원공덕모) : 믿음은 도의 근본이 되니 공덕의 어미요

長養一切諸善法(장양일절제선법) : 일체의 모든 좋은 것을 길러내고

斷除疑網出愛流(단제의망출애류) : 의심의 그물 끊고 애착의 흐름에서 벗어나

開示涅槃無上道(개시열반무상도) : 열반의 무상도를 열어 보인다.

信無垢濁心淸淨(신무구탁심청정) : 믿음은 때가 없고 마음이 깨끗하며

滅除憍慢恭敬本(멸제교만공경본) : 교만을 없애고 공경의 근본이며

亦爲法藏第一財(역위법장제일재) : 법장의 첫째 재물도 되며

爲淸淨手受衆行(위청정수수중행) : 청정한 손이 되어 온갖 행동을 받아 들이네

 

 

迦陵頻伽美妙音(가릉빈가미묘음) : 가릉빈가의 아름답고 미묘한 소리

俱枳羅等妙音聲(구지라등묘음성) : 구지라 등의 묘한 음성

種種梵音皆具足(종종범음개구족) : 가지가지 범음을 다 갖추어

隨其心樂爲說法(수기심악위설법) : 그 마음이 즐겨하는 바 따라 법을 말하네

八萬四千諸法門(팔만사천제법문) : 팔만 사천 모든 법문으로

諸佛以此度衆生(제불이차도중생) :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나니

彼亦如其差別法(피역여기차별법) : 그대들도 그와 같은 차별법으로

隨世所宜而化度(수세소의이화도) : 세상의 마땅함을 따라서 교화고 제도하나니라,



보제루 왼쪽으로 아랫 기단에 12지신상을, 윗 기단에는 팔부중상을 새기고 1층 탑신에 사천왕을 새긴 오층석탑 뒤로

높은 기단위 허물어진 장륙전 위에 세운 석등과 각황전이 보인다.




이 우람한 석등은 높이와 모양 뿐 아니라 조각으로도 위엄을 자아낸다.

팔각의 연꽃 무늬 위에 장고 모양의 형태는 통일신라 이후에 나타난다.

뒤에 세워진 각황전과 묘하게 어울린다. 전에 둘렀던 철제물을 걷어내니 시원해 보인다.

   

 

부처의 몸을 장륙금신(丈六金身)이라 가리켜 세워졌을 장륙전이 임란에 소실되었고

벽암대사도 복구하지 못하였다가 계파대사가 재건하였다.



당시 임금인 숙종이 현판을 내려보냈고, 글씨는 형조참판 이진휴가 썼다.

각황(覺皇)은 각왕(覺王)보다 높여 부른 것이다. '깨달음의 황제'라 칭한 것이다.

 


전내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로 다보불과 아미타불을 두고 문수.보현,관음,지장보살이 협시하였다.

다보불은 석가 과거의 동방정계 으뜸인 전생부처이며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주인으로 무량수, 무진장의 영원불멸의 부처이니 시공을 초월한 깨달음의 황제상을 표현한 것이다.

 


각황전 오른편에 서 있는 홍매화는 붉디 못해 검다는 유명한 꽃으로 계파대사가 심었다.

꽃이 졌으니 볼 수 없으나, 화엄사에 피는 매화는 화엄매, 선암사에 피는 매화는 선암매 등등으로

천연기념물로 등재되었는데 불력의 위시로도 보인다.

 

각황전 왼편으로 올라 보았던 사사자삼층석탑을 보려 하니 수리 중이라 출입금지 라인을 쳐 놓았다.

그러나 수리 중일지라도 보고 싶어 동백 숲을 지나 당당히 계단을 밟아 올랐다.







그리고 갈바로 담을 쳐 놓은 안에 사사자삼층석탑을 보게 되었다.

 

보통 탑은 부처 당사자를 그리고 부처에 대한 신앙심을 표현하고자 하는 양식이며, 절의 창건 사유와도 관계가 있다.

사사자탑은 몇몇 곳에 있고 이 양식이 나타난 것은 통일신라 이후이며 송계에도 빈신사지에 사자탑이 있다.

이 탑은 믿을 수 없으나 이 절을 처음 창건하였다는 연기조사와 얽힌 전설이 있다.

연기조사는 인도 사람이다. 그가 어머니를 그리며 이 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충주 송계의 빈신사지사사자석탑에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이 탑신을 이고 있는 데 반해

탑신 아래 중앙에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 추정하고 탑 앞 석등에서 차를 공양하는 이가 연기조사라 한다.

더욱이 이 자리가 있는 언덕을 효대(孝臺)라고 불리니, 전설을 뒷받침한다.

사실의 유무를 떠나 삼십 년 전 솔잎이 무성한 이 곳에서 사진을 찍었던 나를 다시 보게 되었음이 뭉클할 따름이다.

 


경내를 휘돌아 나오며 각황전으로 푸대접 받는 대웅전 앞 석가탑을 닮은 오층석탑을 감상하다,

운고각(雲鼓閣)에 오르는 스님들을 보며 묘한 기운을 느껴 지켜보니, 뭔가를 준비중이었다.

그리고

!~~~ 이보다 더 훌륭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


법고, 목어, 운판을 두들기니, 배추흰나비! 경내를 뜨겁게 돌다 법고에 취한 듯 흔들리며 미끄러지고,

한국아줌마를 제하고, 객들의 눈과 귀를 꼼짝 못하게 묶어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고편이였다.


타악기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종각에서 사찰은 물론이고 지리산을 뒤흔들, 묵직하며 심장을 되떨리게 하는 무거움이 들렸다.

여승인줄 알았다. 여린 등줄기 가사가 곱다 느꼈더니 스님이였다.

누군가의 블로그에는 팔척 장신의 역동이 표현되었고,

누군가의 글에서는 종소리 그물에 갇혔다더니,

누군가는 비움이라 하더니, 내게는 그물이면서 감옥이며 바다였다.


 



출처 : 열 두 대
글쓴이 : 올곧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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