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시 장락동 65-2번지 일원 장락사지에
높이 9.1m 흑회색 점판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칠층석탑이 서 있다.

석재는 20리 떨어진 용두산에서 캐왔다고 한다.(네이버지식백과)
전탑이나 모전석탑은 많은 부재가 결구되는 특성으로 내구성이 좋다.
아울러 대다수가 고층으로 쌓는 배경에는 교통로 경영과도 관련이 있다.
전탑이나 모전석탑이 남한강과 낙동강 수계에 집중 분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락사지에는 삼국시대에 사찰이 건립되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사찰로 존재했다.

영월 수주에 신라 하대 구산선문 중 하나로 지금의 법흥사 자리에 사자산문 흥녕선원이 있었다.
사자산문의 중창자가 징효대사(澂曉大師)다. 충주와 단양에서 흥녕선원을 가려면 장락사지를 거쳐야 하기에 두 사찰간의 연관을 짓는 경향도 있다.
6·25 당시 포탄에 맞아 1층 탑신부와 옥개석의 남쪽과 동쪽 면, 2층의 동남쪽 옥개석 및 탑신부까지 피해를 입었으나 1967년~1968년에 해체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다.1967년 보물 제459호로 지정되었다.

석탑을 해체, 복원하면서 기단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백자종자편, 금동편, 금동 불상, 사리 장치 석재 등이 출토되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3차에 걸쳐 인근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모전석탑의 조성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석탑의 북쪽과 서쪽 지역에서 확인된 3개 동의 건물지와 추정 담장지 유구를 통해 확보되었다. 건물지 유구 면에서는 삼국 시대의 승문평기와·선문평기와, 통일 신라 시대의 선문평기와·격자문평기와가 출토되어 통일 신라 시대에 건립된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2003년 충청대 장준식관장은
출토된 ‘長’자명기와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는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된 ‘장락사(長樂寺)’의 원 위치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14권 태종7년 12월2일 기록에
“諸州資福寺, 皆代以名刹 曹溪宗 梁州通度寺, ~ 중략~ 天台宗 忠州嚴正寺~중략~ 堤州長樂寺~”
“여러 고을의 자복사를 모두 명문사찰로 대신한다. 조계종은 양주의 통도사~중략 천태종은 충주의 엄정사~중략~제천의 장락사로~”라 적혀 있다.
발굴 조사에서 제5건물지 기단과 제22건물지 및 26건물 기단토에서 모전석탑에 쓰였던 동일한 완형의 석탑 부재가 사용되어 고려시대에 중건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탑의 앞쪽에 위치한 제1건물지는 남북 방향으로 통일신라 평지 가람양식을 따르고 있어, 석탑 앞 법당으로 추정된다.
한편 담장지와 2개 동 건물지는 문지(대문 터)로 절과 탑을 드나들기 위한 시설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석탑 주변의 담장지와 3개 동의 건물지가 형성하는 구조적 형태가 석탑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가장 어울리는 가람 배치 구조를 보이는 점 등으로 미루어 석탑의 조성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석탑은 높게 조성한 토단 위에 점판암이 아닌 자연석으로 지대석 1단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바로 받치도록 하였다.
지대석은 모두 8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남쪽 면에 커다란 판석 1매를 놓고 북쪽과 동·서단부에 7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였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을 7층으로 쌓아 올린 모습이다.
1층 몸돌의 남쪽과 동쪽면과 2층 지붕돌이 전쟁으로 석재 일부가 떨어져 보수되었다.
1층 몸돌은 높이가 네 귀퉁이에 있는 화강암 기둥과 같고 너비는 2.8m이다.
네 귀퉁이에는 높이 1.37m,너비 21㎝ 크기의 단면이 네모난 화강암 기둥이 서 있는데, 이것은 여느 전탑(塼塔)이나 모전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또한 남북 양면에는 화강암으로 문기둥 2개를 세우고 미석(楣石, 이마돌)을 얹어
높이 1.37m,너비 1.08m 크기의 방광(方框,네모난 틀)을 만들고, 문비(門扉)가 달려 있지만, 남쪽면의 것은 없어졌다.

방광의 외부 크기는 137×108㎝이고
내부 감실의 크기는 남쪽이 85×60.5㎝이며, 북쪽이 85.5×63㎝이다.
문비는 2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중앙부에 지름 1.5㎝, 깊이 6.5㎝로 2개의 홈을 내었다.
이 홈은 별도의 문고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쪽과 서쪽의 면석은 전체를 모전 석재로 쌓았던 데 반해, 남쪽과 북쪽의 면석은 화강암 기둥과 네모난 문 사이에만 쌓았다.
몸돌의 모든 면에는 회(灰)를 덧칠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상주 석심회피탑(石心灰皮塔)과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진 석탑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은 모전(模塼) 석재는 크기가 같지 않은데, 길이와 너비는 대략 28∼52㎝ 정도이고 두께는 4∼7㎝이다.

옥개석은 전탑 특징으로 위아래 모두 층단을 두었고 처마는 짧다.
추녀 처마는 수평을 이루며 네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풍경을 달도록 하였다.
옥개 받침은 7~9단이며 층단도 이에 준한다.
옥개석은 15단 내외로 구성되었다.

1967년의 해체 복원 당시
5층 옥신부에서 길이 50~54㎝, 높이 31㎝의 부등변 사각형의 화강암 석재가 있었고,
그 중심에 한 변이 13.5㎝이고 깊이가 4.5∼5.5㎝인 네모난 사리 구멍이 있었으나 그 안에 내용물은 없었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다만 7층 옥개석 꼭대기에 한 변이 70㎝ 정도인 낮은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고,
그 중심에 지름 17㎝의 구멍이 있는데, 주변은 연꽃이 조각되었다.
이 구멍은 6층 탑신부까지 뚫려 있으며, 찰주(擦柱)를 꽂았던 구멍으로 보인다.
또한 7층 옥개석 윗면에서 꽃무늬가 투각된 청동 조각이 발견되어 원래 정상부에 청동으로 만든 상륜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의 건립 시기는 조성 방법이나 부재의 가공 수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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