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이인상의 구룡연도와 해제

허접떼기 2020. 3. 14. 22:28


유홍준이화인열전에 이리 썼습니다.

만약 그림의 세계에도 바둑처럼 급수가 있다고 할 때 조선시대 화가 중에 입신의 경지라는 9단에 오른 이는 몇이나 되며, 9단 중에서 타이틀을 차지할 만한 기량을 갖고 있는 화가는 누구일까?
또 그림의 세계에도 운동경기처럼 종목이 있다고 할 때 진경산수에서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 속화에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가 금메달을 차지한다면 문인화는 누가 차지할 수 있을까?
나는 단연코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이 그 영광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나 개인의 의견만이 아니다. 당대의 평가도 그렇고 오늘날 미술사가 대부분의 견해도 그렇다.

 

 

20년간 이인상을 연구하여 능호집⟫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을 저술한

박희병 서울대교수는 이리 이인상을 정리하였습니다.

''는 이인상 작품을 이해하는 핵심어다.

이인상 글씨 중 '막빈어무식(莫貧於無識), 막천어무골(莫賤於無骨)'이란 글이 있다. '식견이 없는 것보다 가난한 것은 없고, 뼈가 없는 것보다 천한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이인상은 모든 생명 존재와 인간의 정수가 뼈에 있다고 보는데, 그의 그림과 글씨에는 내면의 기골이 느껴진다."

"추사 글씨에는 졸(·기교를 부리지 않음)을 잘 구현하겠다는 교(·기교)가 있는 반면 이인상의 글씨에는 그런 의식도 없고 그런 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의식도 없다."
"겸재나 추사의 작품이 기름진 산해진미(山海珍味)라면 이인상의 작품은 기름기 쫙 빠진 자연 채소다"

"동아시아로 넓혀 봐도 독자적인 미학 현상을 보여주는 예술가다.“

"그림과 글씨의 법도를 완전히 습득한 후 이를 뛰어넘어 예술가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경지를 보여준다."

 

이인상의 뿌리는 세종에 있습니다.

세종의 3번째 부인으로 내자시 여종출신으로

세종이 즉위하던 해 13세의 나이로 중궁전으로 발탁되어

정비 소헌왕후 심씨의 지밀나인이 되었다가 성은을 입어

조선사 후궁으로 가장 많은 자녀 62녀를 낳은,

조선의 신데렐라, 신빈김씨(愼嬪金氏, 1406?-1464)

삼남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1430-1479)6대손이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1585-1657)입니다.

이경여도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습니다.


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재주는 유전이라는 사견을 갖고 있어섭니다.

 

이경여가 이인상의 고조부입니다.

그러나 증조부 이민계(李敏啓,1637-1695)가 서자였습니다.

조선시대 서얼은 아주 특별한 시기를 제외하고 종5품이 승급의 한계였습니다.

그의 조부 이수명(李需命,1658-1714)과 증조부 이민계는

지방 현감과 품계가 같은 종6품의 찰방(察訪)직을 지냈고,

부친 이정지(李挺之,1685-1718)는 종5품의 통덕랑(通德郞) 품계를 받았는데

이인상의 나이 만 여덟에 졸했고,

숙부인 이최지(李最之, 1696-1774)는 정산현감(定山縣監)을 지냈습니다.

이최지는 학식과 전각(篆刻)으로 이름이 나, 이인상에게도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박교수는 이인상의 지극한 경지를 보여준 작품으로 '구룡연도(九龍淵圖)'를 예로 들었습니다.

이인상이 1752년 금강산 구룡연을 그린 그림입니다.

얼른 보기엔 그리다 만 그림 같습니다.

이인상은 화제(畵題)에서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몽당붓과 담묵(淡墨)으로 뼈[]만 그리고 살[]은 그리지 않았으며

색택(色澤·빛깔과 광택)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히 게을러서가 아니라 심회(心會·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가 중요해서다.'

박 교수는 "군더더기나 부귀공명 같은 이름은 필요치 않다는 올곧은 자세를 나타낸 것"이라며

 "겸재가 호방하고 활달한 필치를 보여준다면 이인상은 신념을 지키고 세상과 맞서는 비장한 미감(美感)을 준다."고 했습니다.

 

능호관은 1752년 관찰사와 의견 충돌로 싸우고 음죽현감 직을 떠났습니다.

황경원(黃景源,1709-1787)은 능호관의 묘지명에 이 일을 적었습니다

영조28년 임신년 1752, 황경원은 우승지를 거쳐 817일에 대사간이 되었다가

109일 이조참의가 되었습니다. 3품의 당상관입니다. 황경원은 골수 친명파였습니다.

이인상도 반청의식이 강한 노론이었으니 신념이 비슷하였고 관계가 깊었습니다.

황경원은 <구룡연기(九龍淵記)>에 이리 적었다.

금년 가을에 이군(李君) 원령(元靈, 이인상(李麟祥))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구연시(九淵詩)를 본()으로 삼아

그림으로 그리고는 내게 기문을 부탁했다

(今年秋 李君元靈 本三淵金公昌翕所爲九淵詩 而爲之圖 屬余爲記)

둘의 나이, 한 살 차이지만 당상관인 황경원이 보았을 때 이인상은 서출의 자손이며

3품과 종6품의 현실 차이가 있어 이군이라 칭한 것입니다.


그해 경기감사는

228일 부임한 정휘량(鄭翬良,1706-1762)

328일 부임한 김한철(金漢哲,1701-1759)

702일 부임한 김상익(金尙翼,1699-1771)이었습니다.

가을에 금강산을 찾았으니 김상익과 싸우지는 않았을 테고

같은 노론이었던 김한철보다는

1755년 나주괘서사건 때 조태구, 유봉휘를 노비로 만든 소론의 일원인 정휘량일 가능성이 크다고 나는 봅니다.


 

이 그림 아래 왼편에 써 놓은 글을 풀어봅니다.

丁巳秋 陪三淸任丈(정사추 배삼청임장)              

觀苐九龍淵(관제구룡연)         

後十五年(후십오년)           

謹寫此幅以獻(금사차폭이헌)

而以乃禿毫淡煤(이이내독호담매)   

寫骨而不寫肉(사골이불사육)      

色澤無施(색택무시)           

非敢慢也(비감만야)           

在心會(재심회)              

 

李麟詳 再拜        

 

정사년(1737) 가을 삼청동 임씨 어른을 모시고

아홉 번째의 구룡연을 보았습니다,

15년이 지나

삼가 이 폭을 그려 드리고자하는데,

겨우 몽당붓에 담백한 먹으로

뼈대만 그리고 살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색택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구태여 거칠게 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깨달음이 있어섭니다.

이인상이 올립니다.

 

이 글에서 나로서 도무지 모르겠는 글자가 로 읽을 수밖에 없는 글자입니다.

분명 의 뒤에 나오는 글자는 禿毫淡煤와 어울려 목적어가 되는 명사여야 됩니다.

그래서 라는 글자의 해를 살폈습니다.

이에, , 그래서, 더구나, 도리어, 비로소, 의외로, , 다만, 만일, 겨우, 어찌, 이전에, , 이와 같다....

그림이 보여주는 상태를 보아 털이 빠져 몽당해진 붓을 뜻하는 禿毫(독호) 앞에 쓰일 경우와 글의 겸손한 의미를 따져보아 겨우라는 해석으로 꽂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