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진(金圭鎭,1864. 4. 14. ~ 1933. 6. 28.)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서화가이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 백운거사(白雲居士), 취옹(醉翁), 만이천봉주인(萬二千峯主人), 삼각산인(三角山人)등이다.
평양의 유명한 명필이었던 외숙 이희수(李喜秀)에게 서예를 배웠으며,
18세부터 청국(淸國) 각지를 10년 가까이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자질을 키웠다.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에게 서법(書法)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술을 습득하고 귀국하여 천연당사진관(天然堂寫眞館)을 개업하였으며
같은 건물에 고금서화관(古今書畵館)을 개설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적 상업 화랑을 열었다.
1915년에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를 창설하고
1918년 서화협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약칭 조선미전]에
1922년 제1회부터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사군자부, 동양화부에 서, 사군자(書, 四君子) 작품을 수차례 출품하였다.
전국 곳곳에서 서화전람회를 개최하였으며,
서화반포회(書畵頒布會)를 열어 작품가를 설정, 공개하여 자신의 작품을 매매하기도 하였다.
서예 각체는 물론, 서법을 기본으로 하여
사군자, 화훼, 산수 등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난죽(蘭竹), 즉 묵란과 묵죽을 즐겨 그렸다.
1920년 새로 중건된 창덕궁 내전의 벽화 제작에 참여해 희정당의 동서 벽면에
<해금강총석정절경도(海金剛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를 그렸는데, 높이 2m, 길이 9m에 가까운 대작이었다.
위 그림 오른쪽 아래에 쓴 글은
장뢰(张耒,1054—1114)의 <죽당(竹堂)>에 있는 글이다.
해강이 갑자천중절(甲子天中節)에 썼으니 1924년 단옷날 한낮이다.
제요록에 오월 오일 오시를 천중절이라 했다. (提要錄曰 五月五日午時 爲天中節)
장뢰는 북송 초주(楚州) 회음(淮陰) 사람으로
자는 문잠(文潛), 호는 가산(柯山)으로 사람들이 완구선생(宛丘先生), 장우사(張右史)라 불렀다.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후학 중
황정견(黃庭堅), 조보지(晁補之), 진관(秦觀)과 함께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로 불렸다.
<죽당>은 이렇다.
誰道清貧守冷官 繞家十萬翠琅玕 수도청빈수랭관 요가십만취랑간
直應流水深相與 不待清風已自寒 직응류수심상여 부대청풍이자한
學得鳳鳴真自許 化成龍去不終蟠 학득봉명진자허 화성룡거부종반
知君何世無來者 可是王郎獨與歡 지군하세무래자 가시왕랑독여환
冷官(냉관)은 지위를 떠나 사무가 바쁘지 않은 관직을 말한다.
琅玕(낭간)은 중국에서 나는 경옥으로 장식에 쓰인다.
流水(유수)는 흐르는 물이며 세월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鳳鳴(봉명)은 봉황의 울음이다.
귀하고 소중하다는 의미다.
아울러 성군이나 위인이 나타날 징조를 뜻한다.
自許(자허)는 자기 힘으로 넉넉히 할 만한 일로 여긴다는 말이다.
知(지)는 말하다 이다.
그리고
王郎(왕랑)은 누구일까?
조비의 선양에 공신이었던 왕랑(?~228)을 말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대나무 없이는 못 산다(不可無竹)는
왕희지(王羲之)의 5번째 아들인 왕휘지(王徽之,338-386)를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此君)없이 어찌 하루라도 살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邪)!"라며
대나무를 친구로 여기며 사랑했다.
대나무 없는 곳에서는 잠도 잘 수 없어서 거처하는 곳에 대나무가 없으면
반드시 옮겨 심고 나서야 잠을 잤다고 한다.
누가 한직을 지켜 청빈하다 말하나?
셀 수없는 푸른 옥석이 집을 둘렀으니!
흐르는 세월을 바로 마주하고 사귐을 깊이 하듯
맑은 바람을 기다리지 마라 이미 절로 춥다.
봉황의 울음을 배웠음을 진실로 여기니.
용이 지나는 냥 만들어져 끝없이 둘러졌다.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말하니
왕휘지의 고독과 환희일 것이다.
해강이 그린 석죽도를 본다.
이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 적은 글은 이렇다.
岩竹倒垂秋水碧 渚蓮平接夕陽紅 암죽도수추수벽 저련평접석양홍
바위에 대나무가 넘어져 가을 물에 드리우니 푸르고,
물가 연꽃은 가지런히 석양과 맞닿아 붉구나!
이 글은 조사수(趙師秀,1170~1219)가 지은 <진특제호루(陳待制湖樓)>의 두 구절이다.
조사수의 자(字)는 자지(紫芝)고, 호(號)는 영수(靈秀) 영지(靈芝), 천락(天樂)으로
지금은 절강성 온주(今浙江溫州)인 영가(永嘉)사람이다.
남송말기 서조(徐照,?~1211,字:靈暉), 서기(徐璣,1162~1214,號:靈淵), 옹권(翁卷,字:靈舒)과 더불어
맑고 질박한 시풍을 표방하여 영가4령(永嘉四靈)으로 불렸다.
<진특제호루(陳待制湖樓)>의 실제 내용은 垂(수)가 아닌 添(첨)이다.
何處飛來縹緲中 人間惟有畫圖同 하처비래표묘중 인간유유화도동
兩層簾幕垂無地 一片笙簫起半空 양층염막수무지 일편생소기반공
岩竹倒添秋水碧 渚蓮平接夕陽紅 암죽도첨추수벽 저련평접석양홍
遊人未達蒙莊旨 虛倚欄杆面面風 유인미달몽장지 허의난간면면풍
縹緲(표묘)는 끝없이 넓거나 멀어서 어렴풋하다 이다.
惟有(유유)는 다만, 오직. 오직 ...하여야만 이다.
人間(인간)은 인간세상, 속세, 인간사회라는 뜻이다.
簾幕(염막)은 발과 장막(帳幕)이고
無地(무지)는 한 빛깔로 무늬 없는 물건이다.
동사로는 몸 둘 곳이 없다. 앞의 동사의 쓰임이 어쩔 도리가 없다 이다.
笙簫(생소)는 생황(笙篁)과 퉁소다.
半空(반공)은 半空中(반공중)으로 하늘과 땅 사이 그리 높지 않은 허공이다.
添(첨)은 사실 강물이 범람하다의 뜻으로 만들어졌고 ‘沾’이 더하다 이었다.
添은 沾의 속자였지만 지금은 添자가 ‘더하다’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옥편(玉篇)》에서는 益(일)이라 하여 넘친다고 해하였다.
旨(지)는 여기서는 只와 같은 의미로 ~뿐으로 쓰였다고 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어렴풋한데,
이 세상은 그냥 그림 같다.
두 겹 장막도 드리울 수 없고,
한 마디 생황 음이 허공에 오른다.
암죽(岩竹)은 넘어져 가을 물에 넘쳐 푸르고,
물가 연꽃은 나란히 석양에 닿아 붉다.
나그네는 아직 검은 장원에 여태고,
난간에 기대니 여기저기 바람이다.
'옛 그림 속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홍도의 고목석죽도와 글씨 (0) | 2020.02.08 |
---|---|
김홍도의 죽리탄금도와 그 화제 (0) | 2020.02.08 |
소호 김응원의 묵란과 화제2 (0) | 2020.01.09 |
소호 김응원의 묵란과 화제 (0) | 2020.01.09 |
장승업,조석진,안중식의 오동폐월과 장봉익의 시 (0) | 2020.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