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이인상의 송하관폭도에 쓴 이윤영의 글

허접떼기 2019. 2. 12. 18:20



이 그림은 이인상의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로 불린다.

제목을 정하는 것은 소장자의 몫이라 뭐라 할 것은 아니지만

보다 그림의 의미에 부합하면 좋을 것이다.

 

이 그림에 이윤영이 제시를 적었다.


怒瀑忽成告外響 浮雲欲結日邊(노폭홀성고외향 부운욕결일변음)

  성난 폭포 느닷없이 일어 밖으로 울림을 고하고

  뜬구름은 해 돋는 부근의 그늘로 엉기려 하네.

秋日上小葫蘆南岡 寫病扇面  (추일상소호로남강 사병위선면)

  가을날 작은 호리병박 들고 남쪽 언덕에 올라

  병든 위암 이최중을 위해 부채에 그리다

 

1.日邊(일변) : 1. 해 돋는 부근. 2. 제왕의 도읍 곧 서울.

  客路離愁江上雨 故園歸夢日邊(객로이수강상우 고원귀몽일변춘)

  객지에서 이별하는 시름은 강위에 비 내릴 때이고, 고향에 돌아가는 꿈은 일변이 봄일 때라오.)

  <최치원崔致遠 진정상태위陳情上太尉>

   渭水流關內終南在日邊(위수류관내 종남재일변)

  위수는 관내에 흐르고, 종남산은 서울에 있느니.)

  <두보杜甫 남경정백중승覽鏡呈栢中丞> - 출처 전관수의 한시어사전

2. 葫蘆(호로) : 호로병박

3. 南岡(남강): 이름이 있는 장소인지, 그저 남쪽 언덕인지 모르겠다.

4. () : 위암(韋庵) 이최중(李最中/1715-1784)

  자는 인부(仁夫)이다.

  1744년 사마시 합격 후 1751년 별시에 문과 乙科로 급제 후

  세자시강원 사서, 홍문관 수찬, 교리 등을 거쳐

  1755천의소감(闡義昭鑑)편찬 시 찬집낭청이 되었다.

  1756년 강원도어사,

  1757년 홍문관응교,삼척부사,이조참의,부제학,예조판서,대사헌,형조판서를 거쳐

  1770년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당쟁으로 갑산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풀려나 함경도관찰사가 되고 우참찬을 지냈다.

  1773년 봉조하(奉朝賀)로 물러났다.

  1782년 이유백(李有白)의 대역부도 죄에 연루되어 추자도로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다.

 

화제(畵題)의 칠언절구는 읍취헌(揖翠軒) 박은(朴誾/1479~1504)

개성 연경궁(延慶宮) 북 송악산 기슭에 있는 역암을 둘러보며 지은

<유역암(遊瀝巖)>의 일부이다.

 

만월대 앞에선 무너진 뜻을 쫓고,

광명사 뒤에선 그윽한 마음을 겪네

고국이 땅에 묻힌 지 천년을 맞아,

우리는 한 곡조로 마주하여 시를 읊는다.

성난 폭포는 저절로 허공 밖으로 울림이 되고

시름에 찬 구름은 해돋이 그늘로 맺힌다.

마땅히 술잔을 들어 가슴속 앙금을 씻으니

흥망이 다함이 없음은 고금의 마음이리.


滿月臺前從敗意 만월대전종패의

廣明寺後更幽心 광명사후경유심

地藏故國應千載 지장고국응천재

詩得吾曹偶一吟 시득오조우일음

怒瀑自成空外響 노폭자성공외향

愁雲欲結日邊陰 수운욕결일변음

且須盃酒洒胸臆 차수배주쇄흉억

不盡興亡古今心 부진흥망고금심


15살에 대제학 신용개가 그 문장에 기특해 사위로 맞았고,

17살에 진사가 되고 18살에 식년문과 丙科로 급제하였던 박은은 20세 약관이던

1498년 유자광(柳子光/1439-1512)이 간사하고

  영의정 성준(成俊/1436-1504)이 유자광에게 아첨한다 상소를 올렸다가,

  거짓을 고한다고 연산군이 파직했다.

2년 뒤에 아내가 죽고

연산군이 지제교(知製敎) 자리를 내렸으나 거절한 박은은 26살 되던

1504년 갑자사화에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의금부로 송치된 뒤 사형에 처해졌다.

허균은 '문장은 김일손이고 시는 박은'이라고 평을 했다. 


이윤영은 위 시에서 , 로 바꿔 적었다.

 

서울대 박희병 교수는 송하관폭 대신 송변청폭(松邊聽瀑)으로 정정함이 옳다 하였다.

박 교수의 견해에 부분적으로 공감한다.


이 그림은 오찬(吳瓚/1717-1751)이 죽은 지 3년이 지난 1754(甲戌年) 가을에 그려졌다 한다.

오찬은 1751년 춘당대시(春塘臺試)에서 장원을 했다.

의소세손(懿昭世孫) 즉 정조의 형을 영조가 후사로 책봉하며

기념으로 치른 시험이 신미년(辛未年) 춘당대시다.

보통의 경우 展試장원이면 종6품의 품계를 받는다.

丙科 급제자가 정9품인 것에 비하면 5단계가 높은 것이니

급제 동기보다 승진이 빠를 수 있는 영광을 얻는데,

오찬은 바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정언은 정6품이다.

오찬은 할 말 다하는 성격이었는지,

여러 상소를 올려 영조에게 쫓겨나고 삼수로 귀양 가 죽었다.

35살이 되던 그해, 한 해에 장원의 영광과 죽음을 함께 한 사람이다.


이인상, 이윤영과 가까웠던 오찬의 죽음을 박은과 비교해 제시를 적었다는 견해가 많다.

그리고 그 해 나이 40이고, 5품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최중이

같은 해 춘당대시를 오찬과 같이 치르고 급제를 했슴에 주목한다.

오찬이 1위를 이최중이 3위로 급제했다. 

아마 이인상은 이최중에게 깊은 뜻을 전하고자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잠작만 한다.


그림에 남자의 시선은 폭포에 있지 않고 소나무인 것 같다.

대개 그림의 주인공은 화가 자신인 경우가 많다. 적적한 이인상이다.

박은이 송악산을 둘러보며 지은 시를 이윤영이 제시로 적은 것은 여러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