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있는 것

정부도 인정한 번역 오류

허접떼기 2011. 2. 23. 19:11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다는 지적을 정부가 시인했다.

이런 지적은 송기호 변호사의 <프레시안> 기고에서 처음 제기됐다.

 

이 글에서 송 변호사는 크게 세 가지를 지적했다.

원산지 기준에 관한 번역 오류역진방지 조항 포함 여부, 그리고 꼭 필요한 일부 단어의 번역 누락 등이 그것이다.

 

 

▲지난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 유럽연합대표부에서 열린 한-EU FTA 협정 통과와 관련해 토마스 코즐로프스키 대사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한국의 조속한 FTA 국회 동의를 촉구했다. ⓒ뉴시스

 

정부, 번역 오류 인정…"국회와 협의 중"

 

송 변호사는 우선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비준동의안 661면을 보면

 

완구류의 '비원산지 재료의 최대 사용 가치'가 40%로 규정돼 있으나,

원문(영문본)에는 50%로 표기됐다고 지적했다.

 

또 왁스류의 경우에도 국회 제출본에는 20%로 표기됐으나 원문은 50%로 적시됐다고 밝혔다.

 

원산지 기준은 수출 제품의 원산지 지위 인정 여부를 가르는 잣대로,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원산지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다면,

국내에서 생산된 제품이라도 FTA 관세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제작된 완구류에 중국산 등 비원산지 재료가 50% 섞였는데, 국내 번역본처럼 40%가 기준이었다면

이 제품은 한국산 대우를 받지 못한다.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해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관계자는

"5000가지가 넘는 품목을 번역하다보니 단순 오류가 생겼으며, 원문 내용을 따르는 게 맞다"고 말했다.

 

정부가 잘못된 번역본을 들고 국회로 가져가, 자칫하다간 국내 관련 업계가 큰 피해를 볼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다만 "송 변호사가 지적한 두 부분에만 오류가 났다"며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만큼,

국회와 수정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조율 중"이라고 해명했다.

 

래칫 조항 있나 없나

 

역진방지 조항 포함 여부는 매우 민감한 대목이다.

역진방지(래칫)란 한번 개방한 부문에 대해서는 다시 규제를 하지 못하도록 함을 뜻한다.

 

그간 정부는 한·미 FTA에는 이 내용이 포함됐음을 인정했으나,

한·EU FTA는 관련이 없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송 변호사는

비준동의안 제7장 '서비스 무역·설립 및 전자상거래'의 부속서 7-다 '

최혜국대우 면제 목록' 부문의 원문과 번역본 내용에 차이가 나며,

 

원문을 보면 번역본과 달리 래칫 조항이 포함됐다고 지적했다.

 

우선 번역본은

"대한민국은 경제통합협정에 따라 개정이 그 협정의 시장접근 내국민대우 및 최혜국 대우에 관한

의무와의 합치를 감소시키지 아니하는 한도에서 모든 조치를 개정할 수 있음"이라고 설명돼 있다.

 

그런데 영문본에는 국회에 제출된 문서에는 번역되지 않은

"as it existed immediately before the amendment

(개정 직전에 존재하였던 조치의 합치성)"이라는 설명이 들어 있다.

 

송 변호사는 이를 두고

"한국이 제3국과 FTA에서 100을 개방하기로 해서 종전 80 수준의 개방폭을 100으로 개정한 후,

다시 자발적으로 120으로 개정했다손 칠 경우,

'환원 직전에 존재했던 120'의 합치성을 감소하는 개정을 할 수 없다"는 뜻이라며

 

"자발적으로 더 자유화한 조치를 되돌릴 수 없게 하는 것을 '역진 방지 조항'(래칫)이라고 한다.

이는 나프타(NAFTA) 식의 대표적인 독소 조항"이라고 지적했다.

 

즉, 사실상 번역에 포함되지 않은 문장으로 인해 사실상 이 부분이 래칫 조항을 설명하게 됐다는 얘기다.

 

실제 이 문장은 한·미 FTA 협정문 11장 투자 부문의 12조 1-다 항의

 

"다만 그 개정은 … 그 개정 직전에 존재하였던 조치의 합치성을 감소시키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조항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당시 정부는 이 부분이 래칫 조항이 맞다고 인정한 바 있다.

정부 주장과 달리 번역되지 않은 부분으로 인해 사실상 한·EU FTA에도 래칫 조항이 포함됐다는 얘기다.

 

송 변호사는 "정부가 이 내용을 왜 번역하지 않았는지가 궁금하다"고 의문을 표했다.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한·EU FTA에 래칫 조항은 포함되지 않았다"며 "있는 것을 숨기는 게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정부 관계자는 "문장의 뜻이 래칫조항을 설명하는 것은 맞다"면서도

"한국이 제3국과 래칫 조항이 포함된 서비스부문 개방을 결의하더라도,

EU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최혜국대우를 받지 못하도록 제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번역을 누락한 이유는

이미 본문에 관련 내용이 다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라며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포함시키지 않았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즉, 한국 정부가 현 수준으로 EU와 FTA를 체결한 후

다른 나라와는 래칫 조항이 포함된 FTA를 체결한다손 치더라도,

EU는 래칫 조항만큼은 최혜국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본문은 래칫에 대한 설명을 하고, 이를 제외 목록에 뒀음을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고 정부는 강조했다.

 

한편 송 변호사는 번역된 비준동의안의 50개가 넘는 조항에 영어 단어 '애니(any)'가 누락됐다고 지적했다.

 

'모든', '어떠한' 등의 수식어가 빠져, 추후 해석과 적용에서 중대한 혼선을 빚을 수 있다고

송 변호사는 우려했다.

 

예를 들어 번역된 부속서 2-다 제9조 '자동차 및 부품 작업반'의 제1항에는

"이 부속서의 적용범위에 해당하는 제품의 무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치를

서로에게 통보하기로 합의한다"고 돼 있으나, 원문은 '모든 조치(any measure)'라고 돼 있다.

 

원문의 구속력이 훨씬 강력하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는

"'any'처럼 내용에 큰 문제가 없는 단어는 번역 과정에서 제외한 게 일관된 원칙"이었다며

"기본적으로는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무리가 없도록 번역했다"고 말했다.

 

또 "일부 단어를 제외했다고 해서 내용에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