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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조대왕 개론

허접떼기 2008. 7. 18. 14:14
 


조는 조선 제22대 왕(재위 1776~1800)이다.

이름 산(祘). 자 형운(亨運). 호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조의 탕평책 그 이후

정조는 문물의 정비에도 힘써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등을 편찬한다. 정조는 문물을 겸비하면서 절대 왕권을 과시했지만, 붕당 사이의 화해나 붕당 자체를 해체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한다. 탕평책이 추구된 18세기에는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사회 경제적 변동이 더욱 심회되어 계층 간의 대립과 마찰 등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항조, 거세, 민란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조의 문화정치의 추진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하여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며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우문지치’와 ‘작성지화’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작성지화’의 명분 아래 기성의 인재를 모아들일 뿐만 아니라, 참상(參上)·참외(參外)의 연소한 문신들을 선택, 교육하여 국가의 동량으로 키우고, 나아가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우문지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 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의 보완, 정리를 위하여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속오례의》,《증보동국문헌비고》,《국조보감》,《대전통편》,《문원보불》,《동문휘고》,《규장전운》,《오륜행실》 등은 그 결과였는데,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하여 뒷날《홍재전서 弘齋全書》(184권 100책)로 정리, 간행되도록 하였다.

혀지지 않은 정조의 죽음

정조는 태손시절부터 숱한 암살의 위험에 시달려야 했다. 정조와 정적관계인 노론벽파가 끊임없이 정조의 목숨을 노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 탓 인지 정조는 무예도 뛰어났고 의술에도 밝았다. 정조의 궁술은 태조 이성계에 버금간다 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학식에도 뛰어나 신하를 가르칠 만큼 정조의 학문 또한 대단했다.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왕이었던 것 이다. 그러나 정조의 이러한 파란만장한 삶의 연속인지 정조의 죽음에도 사실 여러 의혹이 있다. 이른바 독살의 의혹이 바로 그것 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당시에도 독살논쟁은 상당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실학자인 정약용의 저서인 「여유당전서」에서도 독살의 의혹을 제기 하고 있다.

실록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정조의 사인은 "등창" 이다. 등창이란 바로 등에 난 종기를 일컫는다. 정조는 이 등창을 치료 중 과로사 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사실 치료 과정 중 에서는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 되고 있다. 예컨대 그냥 짜도 될 고름을 굳이 수은중독의 위험이 있는 훈방을 했다는 것과 주치의가 노론벽파의 영수인 심환지의 일가친척인 이였다는 점이다.

또 정조는 붕어[崩御]하기 직전부터, 줄곧 신하들을 모아놓고 앞으로의 일대개혁을 단행할 것을 여러 차례 시사했다고 전해진다

출처 : 발길을따라서
글쓴이 : 오세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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