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필의 묘길상도
이 그림 좌상에 적힌 글은 이렇다,
曾於泰岳, 見妙吉祥, 斷巖爲佛, 自是乃家法, 煙客
이전에 금강산(泰岳)에서 묘길상을 보았다.
바위를 잘라 부처를 만들었다. 대가의 수법이다. 연객
歲丁丑流金¹之月, 豹菴光之², 適往梥京,作無暑二册.
蓋䃲礡之際³, 筆端生風, 電光穿鍼, 刹那成功.
座客叫快, 全失三伏之炎蒸.
山水花鳥, 助其淸朗.
是以 名之曰無署帖.
余得見於二年之後, 冰霜之節.
無署二字, 令人肥膚生粟⁴.
思得重裘複房⁵而不得,
則丹靑造化從此可見.
而余欲翻案之爲排寒帖,
老筆已退.
亦安得句回陽和⁶, 噓出一般春光耶.
吳上舍勗汝氏⁷,
幸毋以無塩效顰⁸, 着作終爲襪材⁹之歸也
정축년(1757년) 한여름
강세황이 마침 개성에 가 ⟪무서첩⟫두 권을 만들었다.
대개 두 다리 쭉 펴고 앉아
붓 끝에 바람이 일고 번개가 바늘을 꿰듯 잠깐 사이에 그려낸 것이다.
자리한 사람들이 시원하다 외치며 모두 삼복더위를 완전히 잊었다.
산수와 화조가 그 맑은 기운을 도왔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름 하기를 ‘무서첩’이라 한 것이다.
난 두 해 뒤 얼음과 서리의 계절에 보았다.
‘무서’ 두 글자가 사람에게 살갗에 소름을 돋게 한다.
두텁게 갖옷과 겹옷을 입고 방에 있다고 생각해도 안 되니
그림의 조화를 이로써 알 수 있다.
내가 이를 뒤집어 ⟪배한첩⟫을 그리려 했으나
늙은 붓에 벌써 힘이 없으니
어찌 좋은 글귀를 얻어 억지로 이겨 보고자하며
한 줄기 봄빛을 불어낼 수 있겠는가!
욱여(勗汝) 오언사(吳彦思,1734-1776)는
행여나 못난 솜씨로 흉내 내었다하여
끝내 버선 감으로 만들어 신지 않기를 바란다.
1) 流金(유금)은 한여름이 어울리겠다.
⟪장자(莊子)⟫에 유금초토(流金焦土)라는 말이 나온다.
쇠가 녹아 흐르고, 흙이 그을린다는 뜻으로,
가뭄이 계속되어 더위가 극심함을 비유한 말이다.
⟪초사(楚辭)⟫에는 유금삭석(流金鎙石)이 나온다.
돌을 녹여 흐르게 한다는 뜻으로,
몹시 덥거나 뜨거움을 이른다.
이 글에 나오는 삼복(三伏)이 7월부터 8월까지
뜨거운 한 여름을 나타내는 말이다.
2) 豹菴(표암)은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호(號)고
光之(광지)는 강세황의 자(字)다.
梥(송)은 松의 다른 글씨체다.
3) 䃲礡(반박)은 해의반박(解衣䃲礡)에서 찾았다.
이년 전에 나는 신윤복의 미인도 내용을 해하면서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나오는
‘벌거벗고 두 다리를 쭉 펴고 있었다.’는 화공을
송나라 원군이 진정한 화가라 칭찬했다는 고사를
아울러 적었다.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고 물아일체의 경지를
'해의반박'이라고 하는데
반박은 직역을 하면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있는 자세다.
박물관은 ‘너럭바위에 앉은 자세’라고 해하였다.
4) 肥膚生粟(비부생속)은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는 말이다.
粟은 좁쌀이며 소름이기도하고
肥는 걸우는 것이니 소름이 돋는다가 된다.
5) 重裘複房(중구복방),
‘두텁게 갖옷과 겹옷을 입고 방에 있다’이다
裘(구)는 갖옷(짐승의 털가죽으로 안을 댄 옷)이고
複은 겹옷, 솜옷이다.
翻案(번안)은
①남의 작품을 원안으로 하여 고쳐 지음
②안건을 뒤집음
③외국의 문예작품을 자기나라의 것으로 고침이고
여기서는 뒤집음을 말한다.
6) 陽和(양화)는
속으로는 제압하여 이기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사이좋게 지내는 체함을 말한다.
다른 뜻으로 동짓달과 화창한 봄기운을 뜻하기도 한다.
7)오언사의 호는 욱여이며
그의 조부가 오수채(吳遂采,1692-1759)인데
오수채가 개성유수를 지낼 때 강세황을 불러 함께
여행하며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을 제작하였다.
어쩌면 이 글에 나오는
<무서첩>2권과 <송도기행첩>은 중복될 수도 있다.
<송도기행첩>의 발문에 강세황은
오언사가 회화애호가 이면서 수장가였다고 적었다.
<송도기행첩>과 <묘길상도> 두 점 모두
오언서가 가지게 되었다.
이 글로 보아 허필의 <배한첩>은 이 그림이겠다.
그림도 접은 자국이 보인다.
8) 無塩效顰(무염효빈)
無鹽(무염)은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지명이다.
못생긴 것으로 이름 높은 제나라 선왕(宣王)의 비(妃)인
종리춘(鍾離春)이 태어난 고장이다.
종리 춘이 선왕에게 제나라의 문제와 해결책을 제시하여
황후가 되었는데
춘추시대 월(越)나라 미인 서시(西施)에 비유하여
못생긴 여자를 ‘무염’이라 하고
중국의 대표적인 추녀로 불렸다.
刻畫無鹽(각화무염)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아무리 꾸며도 무염이다’라는 뜻으로
차이 나는 물건을 비교, 맞지 않은 비유를 이르는 말이다.
效顰(효빈)은 본받을 효, 찡그릴 효이니
‘찡그린 얼굴을 본 받는다.’라고 직역된다.
월(越)의 서시(西施)가 불쾌하여 찡그렸더니,
어떤 추녀가 그걸 보고 미인은 찡그린다고 여겨
자기도 찡그렸다는 옛일에서,
①자기분수를 모르고 남의 흉내를 냄을 이르는 말
②남의 결점을 장점인 줄 알고 본뜸을 말한다.
着(착)은 ‘붙다, 옷 따위를 입다, 신을 신다, 머리에 쓰다.’다.
9) 襪材(말재)는 버선 말이니 버선감이다.
毋以無塩效顰着作終爲襪材之歸也는
무염효빈으로(以) 끝내(終) 멸재지귀를 하여(爲)
만들어 신지(着作) 말라(毋)로 해한다.
박물관은 허필이 안산에서 활동한 문인화가라고
그림에 안내 하였지만 그렇지는 않다.
집은 서울 남산아래에 있었고
표암이 안산에 있어 자주 들렀으며
이른바 ‘안산15학사’와 교류하였을 뿐이다.
허필은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의 집안이다.
인조반정(1623년)이후 북인은 모두 몰락했다.
일찍이 광해군의 옹립으로 소북은 소멸되었고,
반정 이후 노서파의 도움으로 남인으로 간판을 바꿨다.
숙종 시기 남인의 영수인 윤휴, 이익, 유형원도
가계의 배경은 소북이었다.
남인으로 서울 경기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이들을
근기남인(近畿南人)이라 부르는데
대체로 이황→ 정구→ 허목→ 이익으로 그 계보가
이어진다는 게 일반적이다.
허목의 1674년 갑인예송 승리로
남인이 대거 등용되었지만
당시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1610-1680)과 갈등을 빚었고
허적의 실수로 시작된 경신년(1680) 대출척,
또는 경신환국으로 남인은 몰락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반짝했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처절히 응징되다가
1728년 세종의 후손이기도 한 이인좌가 일으킨 난으로
남인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조용히 지냈다.
정조대에 와서야 겨우 중앙에 진출한 경우가 있었으나
정조 사후 아예 정계에서 사라졌다.
허필(1709-1768)이 173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더 이상
벼슬길에 오를 수는 없었던 것은 바로 그의 가계 때문이다.
1744년 강세황은 안산으로 이주하였고 허필이 죽고 난 뒤
환갑이 되던 1773년이 되어서야 벼슬길에 올랐다.
둘의 우정은 각별하였다고 한다.
안산15학사의 증언(글)에 의하면
허필은 왕유에 빗대 종남산인(終南山人)으로 불리는 데
그가 서울 남산아래에 살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마애불상인 묘길상은 고려 나옹이 조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보다 오래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원래 이 석불의 이름은 아미타여래상이지만
조선후기 문신이며 서예가인
윤사국(尹師國,1728-1809)이
인근에 있던 묘길상이라는 암자의 이름을
이곳에 새기면서부터 묘길상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묘길상은 문수보살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