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글

정홍래 外 강심초각도(江深草閣圖)

허접떼기 2019. 2. 23. 00:02


이 그림은 두보(杜甫/712-770)의 시를 사의(寫意)로 하여 시의 일부 구절을 제목으로 한다.

바로 강심초각도(江深草閣圖)라 불린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정홍래(鄭弘來/1720~?)는 본관과 자가 알려지지 않은 분이다.

그의 호는 만향(晩香), 국오(菊塢).

출생년도가 알려진 것은 그가 도화서(圖畫署) 화원으로 숙종의 얼굴을 29살에 그렸기 때문이다.

그해 1748년 당시 같은 도화서 화원인 장득만과 장경주와 함께 어진을 모사했다.

그리고 1755년 그가 참여하여 그린,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왕의 나이 60이 되어

70이 넘은 신하들과 모임을 가진 것을 기념하여 그린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이 그림에 적힌 글을 본다.

百年地辟柴門逈(백년지피시문형오래도록 외진 곳에 살아 사립문은 먼데,

五月江深草閣寒(오월강심초각한오월의 강은 깊고 초가 누각은 쓸쓸하네.

 

甲子初春下澣    1744(갑자년) 음력 1월 하순

晩香鄭弘來   만향 정홍래

 

이글의 地辟(지피)地僻(지벽)이 맞는다. 깊숙하여 외진 곳이라는 뜻이다.

 

중국 성도에 가면 초당이라는 두보의 거처가 있다.

두보가 엄무(嚴武/726-765)의 막부 참모로 잠시 있었다.

엄무가 토번을 토벌 한 공으로 검교이부상서(檢校吏部尙書)에 있을 때

두보의 직책이 정확히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사람들이 그를 두공부(杜工部)라 부르는 연유다.

엄무가 두보의 후원자라고 보는 게 옳다.

두보는 엄무가 죽자 의지처를 잃어 성도를 떠났다.

 

嚴公仲夏枉駕草堂,兼携酒饌      엄공이 음력5월에 술과 안주를 가지고 초당에 찾아오셨다


竹裏行廚洗玉盤 花邊立馬簇金(죽리행주세옥반 화변입마족금안

非關使者征求急 自識將軍禮數(비관사자징구급 자식장군예수관)

百年地僻柴門逈 五月江深草閣(백년지벽시문형 오월강심초각한)

看弄漁舟移白日 老農何有罄交(간롱어주이백일 노농하유경교환)

 

대숲 속에 옥그릇을 씻어 주방 차리니 꽃 옆엔 줄지어 황금 안장의 말이 서고.

사자가 급히 부르는 것을 관계 않으니, 장군의 예의가 관대함을 스스로 알겠네.

오래도록 외져 살아 사립문은 멀고오월의 강은 깊고 초가 누각은 쓸쓸하네.

고깃배가 밝은 날 옮겨 보고 즐기니 늙은 농부라 어찌 사귐에 즐겁지 않겠는가?

 

이 시를 중국, 한국, 일본도 즐기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지었다는 데 있다.

중하(仲夏)인 단오절에 이라는 글자가 어울리지 않음에도

, , , (, , , )을 압운(押韻)한 탓에

억지로 넣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썩 훌륭한 구성을 만들어 시구를 완성한 것이다.

두보가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 칭하는 재주다.

차다라는 뜻외에 쓸쓸하다와 침묵하다, 울지 않다의 의미도 있다.

그윽하고 적막한 곳에 지은 초각(草閣)이 낯설고 생뚱맞아 보이니 쓸쓸하다 한 것이다.

 

두보의 시구를 화제(畫題)로 한 이른바 강심초각도(江深草閣圖)

명대 오문파 심주(沈周/1427-1509)이후 화풍을 이어가며 청대까지 끊이지 않은 주제였다.


심주의 영향을 받아 두보의 시를 사의하여

몇 폭에 이르는 강심초각을 그린 이가 당인(唐寅/1470-1524)이다.





예찬의 제자로 중국의 단원인 이류방(李流芳/1575-1629)의 강심초각도



명이 망하자 청에 입조하지 않고 의학을 연구하여 대성한 서예가 부산(傅山/1606-1684)

그가 병오년(1666년)에 그린 그림


사왕오운(四王吳惲)의 하나인 石谷 왕휘(王翬/1632-1717)가 1680년에 그린 강심초각도



왕운(王雲/1652-1735)이 남송(南宋) 희고(晞古) 이당(李唐/1066-1150)의 필의를 본떠 1695년에 그린 강심초각도  



그리고 조선의 칠칠(최북)께서도 이 주제를 1748년에 그렸다.

이 그림을 삼기재(三奇齋)라는 호를 쓰고 일본에 가셔서 그려주었다 한다.


이 그림과 위에 언급된 명대 화가 당인의 부채 그림과 비교해본다.